영화 ‘윈터슬립’의 한 장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윈터슬립’
위선으로 가득 찬 지식인 삶 깨워
체호프·도스토예프스키 향 곳곳에
터키 카파도키아 기암괴석 절경
3시간16분 대장정…화장실 필수
위선으로 가득 찬 지식인 삶 깨워
체호프·도스토예프스키 향 곳곳에
터키 카파도키아 기암괴석 절경
3시간16분 대장정…화장실 필수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마침 하굣길의 아이들로 거리가 가득하다. 한 남자아이가 자동차를 탄 ‘아이딘’(할룩 빌기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잠시 뒤, 소년은 달리던 차를 향해 돌을 던졌고 차의 옆 유리창이 깨진다. 아이딘은 마을의 지주이고, 25년 동안 연극배우로 살았고, 요즘은 가끔 신문에 칼럼을 게재하는 지식인이다. 아이딘은 남자아이 눈에 서려있는 적개심을 이해할 수 없다.
지난해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거머쥔 <윈터 슬립>이 관객을 찾는다. 칸 영화제에서만 8번 상을 받은 터키 감독 누리 빌게 제일란(56)의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소재는 소년의 돌멩이 투척 사건이다. 하지만 영화의 전개의 대부분은 아이딘과 그의 아내, 그리고 아이딘의 여동생 등 세 사람이 주고받는 대사로 채워져있다. 대사가 길고 묵직한 의미를 담고 있어 한 편의 희극작품을 읽는 듯하다. 감독은 여동생과 함께 사는 문학 평론가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 <뛰어난 사람들>(Excellent People·1896)과 자선활동을 벌이는 아내의 이야기를 그린 <아내>(The Wife·1896) 등 체호프의 작품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체호프의 작품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영화 속에서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말다툼은 상대의 가슴 깊이 비수를 꽂아넣듯 날카롭고 위태롭다. 이를테면, 이혼하고 별다른 하는 일 없이 오빠 집에 함께 사는 여동생 ‘네즐라’(드멧 앳백)는 아이딘의 신문 칼럼을 두고 “네 비판엔 일관성도 없고 소모적이야”라고 힐난한다. “오빠 문제가 뭔지 알아? 고통 받지 않으려 스스로를 속이는 거야”라고도 몰아세운다. 두 지식인의 대화이지만, 차라리 어느 한 쪽이 중간에 문을 박차고 나가주길 바랄 정도로 지켜보기 힘겹다.
젊고 예쁜 아내 ‘니할’(멜리사 소젠)은 또 어떠한가. 아내는 남편에게 “당신이란 사람 못 견디겠어요. 이기적이고 심술궂고 냉소적인 성격, 그게 당신의 죄목이예요”라고 쏘아붙인다. “양심이며 도덕. 이상과 원칙, 삶의 목적. 당신 입에서 자주 나오는데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폄하할 때만 쓴다”면서 지식인 아이딘의 ‘위선’을 공격한다. 이런 대화 장면은 관객의 예상을 멀찌감치 벗어나 아주 길게 이어지지만, 팽팽한 긴장감을 끝까지 잃지 않으면서 관객의 목을 죄는 듯하다.
감독은 영화에서 이들 세 사람의 철학적, 문학적 대화에 상당한 분량을 할해했지만,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사건’도 굉장한 힘을 발휘한다. 소년이 던진 돌멩이는 영화의 중간중간에 불쑥 고개를 내밀면서 계속 새로운 의미를 던진다. 소년은 지독한 가난과 상처받은 자존심을 상징한다. 소년이 삼촌 손에 이끌려 10㎞의 진흙길을 걸어와 아이딘한테 사과하려는 장면에서, 인간의 잔혹함이 느껴진다. 초원에서 야생마를 생포하는 장면으로 곧장 이어지는데, 밧줄에 목이 졸린 야생마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장면은 가슴을 후벼파는 은유다. 돌멩이 사건은 영화 후반보다 강한 충격적 전개로 이어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실제, 영화의 포스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속 삽화에서 따왔다.
영상미도 빼어나다. 영화 배경인 터키의 카파도키아 지역은 아나톨리아 고원 화산지대인데, 세계 100대 경관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기암괴석이 장관인데, 특히 영화 후반부의 눈내리는 장면은 영화의 비장감을 훌륭히 떠받친다. 영화음악은 오직 한 곡,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 가장조 2악장이다. 극의 사실적 전개를 위한 ‘절제의 미학’이다.
러닝타임은 무려 3시간16분, 총 196분이다. 수입·배급사 쪽에선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둘까 고민했지만, 영화의 흐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인터미션 없이 상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관객들은 영화 시작 전에 화장실에 꼭 들르고, 물이나 커피도 삼가는 게 좋겠다.
아이딘은 여러 갈등과 사건을 겪은 뒤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감독은 삶에 대한 관조, 두터운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지는 것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딘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 관객들은 과연 이런 마무리에 동의할까. 5월7일 개봉.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영화 ‘윈터슬립’의 한 장면.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