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큐라 백작과 신데렐라 이야기는 수없이 변주된다. 서양 중세의 전설이나 민담이지만, 현대인을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신데렐라 영화’가 새로 나왔다. 아슬아슬한 멜로로 시작해 범죄스릴러로 흘러가는 <은밀한 유혹>이다. <세븐데이즈>(2007년) 각본을 쓰고, <시크릿>(2009년)을 연출한 윤재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무대는 마카오. 여행사를 운영하던 ‘지연’(임수정)은 믿었던 친구한테 배신을 당한 뒤 빚에 쫓겨 술집에서 맥주잔을 나른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마카오 최고의 부자인 카지노 그룹 회장(이경영)이 간병인을 구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회장의 비서이자 아들인 ‘성열’(유연석)은 회장과 결혼해 재산을 상속 받아 절반씩 나누자는 거래를 제안해 온다. 지연은 게임을 시작하고, 드디어 회장과의 결혼에 성공한다. 그런데 회장의 갑작스런 죽음은 모두를 위기로 내몬다.
배우 임수정은 1일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의 한 찻집에서 기자들을 만나 “여성이라면 누구나 왕자님이 나타나는 걸 상상하지 않느냐. 신데렐라 이야기는 앞으로도 새로운 캐릭터로 계속 재탄생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영화의 전반부는 지연의 신데렐라 성공담이 뼈대를 이룬다. 가난하지만 당찬 여성이 까다로운 성격의 부자와 티격태격하면서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얘기니, 동화나 익숙한 텔레비전 드라마와 닮았다.
영화는 그러나 동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연은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지만, 자신은 오히려 ‘치명적 매력’의 성열에 더 끌린다. 임수정은 “성열은 외로운 지연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다. 여자로서 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영화는 회장을 가운데 두고 지연과 성열이 행성처럼 맴도는 구조 속에서 극적 긴장감을 높여간다.
이경영은 이번에도 연기력으로 영화의 중심을 잡는다. 유연석이 정장과 수영복 차림에서 뿜어내는 매력은 여성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임수정 특유의 상큼함은 남성 관객이 누릴 호사다. 또, 마카오 - 호화 요트 - 부산으로 이어지는 공간적 배열은 고통스런 지하세계와 호화로운 천상의 세계, 초라한 현실 등을 각각 상징한다. 요트에 걸려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생명의 나무>도 지옥 - 천상 - 현실을 은유한다. 영화는 삼단구조, 세개의 공간 등 이른바 숫자 ‘3’을 곳곳에 숨겨두고 있는 셈이다. 숫자 ‘2’가 중국의 음양설에서 보듯 현실을 설명하려는 노력이라고 한다면, ‘3’은 현실에 상상을 하나 더해 더 웅장한 세계를 꿈꾼 것은 아닐까.
영화의 막바지, 지연은 ‘현대판 신데렐라’의 면모를 선보인다. 앉아서 왕자가 유리구두를 가지고 나타나길 기다리지만은 않는다는 얘기다. 임수정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잡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게 현대적 의미의 신데렐라인 것 같다”고 했다. 스릴러 영화 답게 감독은 막바지까지 마지막 승자가 누구인지 감추려 노력한다.
임수정은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이후 3년 만에 관객을 찾았다. 이번 영화 속에서 순박한 여자, 불안한 여자, 성공을 욕망하는 여자 등 여러 표정을 소화해냈다. “자신을 버리고 극중 캐릭터로 뛰어드는 배우도 있지만, 저는 제 속의 어떤 모습을 확대하고 변형해 밖으로 꺼내요. 그렇다면, 제가 약간 다중인격인 셈인가요?”
이제 30대 중반인 임수정은 “20살 무렵에 데뷰한 뒤로 그동안 연기의 무게에 짖눌려 잘 즐기지 못했어요. 이제는 좀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라고 이번 영화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어 “ ‘동안’ 덕분에 어린 나이에 내면이 성숙한 캐릭터를 많이 해왔어요. 앞으로는 나이에 맞는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갖고 싶어요”라고 덧붙였다. 언젠가 나쁜 여자 캐릭터를 꼭 해보고 싶다는 임수정은 요즘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랜 굴드에 푹 빠져있다고 한다.
영화는 <지푸라기 여자>(1954)라는 프랑스 소설에 바탕을 뒀다. 작가이자 배우인 카트린 아를레가 19살에 발표한 작품이다. 007 시리즈의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1964)로 만들어져 국내에서 <갈대>라는 이름으로 개봉된 적 있다. 소설 원작은 이번에 한국적으로 각색됐다. 4일 개봉.
안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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