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암살’의 전지현, ‘차이나타운’의 김혜수, ‘협녀’의 전도연.
2015년 스크린은 ‘여인천하’가 됐다. 근 몇 년 동안 충무로에는 ‘여배우 기근현상’이 심각했다. 20대 ‘꽃미남’에서 40대 ‘꽃중년’까지 남자배우들이 영화계를 휩쓰는 동안 여배우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단순히 여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운 영화가 많아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캐릭터 역시 더 다양해지고 있다. 2015년 ‘여풍’의 시작은 <차이나타운>이 열었다. 남성의 전유물이던 누아르 장르에 김혜수·김고은 여성 투톱을 내세웠다. 새로운 시도로 평가받았다. 김혜수는 트레이드마크였던 ‘섹시미’를 버리고 불룩 튀어나온 배에 검버섯 가득한 얼굴을 한 중년 여성으로 오직 연기로 승부했다. <은교>의 해맑은 모습을 지운 김고은 역시 생존을 건 싸움을 벌이는 조직원으로 거듭났다. <차이나타운>은 1000만명을 동원한 외화 <어벤져스2: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공세 속에서도 147만명을 끌어모으며 선전했다.
여배우들의 약진은 여름 성수기에 탄력을 받았다. 180억짜리 대작 <암살>은 사실상 전지현 ‘원톱’ 영화다. 독립군 암살단 리더와 친일파의 딸로 ‘1인 2역’을 맡은 전지현은 이름값을 하며 1000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이정재·하정우 등 걸출한 남자배우가 등장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안옥윤’ 역의 전지현에게 초점을 맞춘다. 무협영화 <협녀: 칼의 기억> 역시 전도연·김고은의 힘으로 끌고가는 영화다. 박흥식 감독은 “애초부터 여성이 주인공인 무협영화를 기획했다”는 말로 여배우의 중요성을 분명히 했다. <뷰티 인사이드>는 한효주의 영화다. 이진욱·이현우·유연석 등 대세남들은 고작 1~2 장면씩 출연할 뿐, 영화는 한효주의 감정변화에 따라 움직인다. 열심히 살아도 밑바닥인 삶에 지친 여자가 극단적 살인 행각을 벌이는 이정현 주연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골드미스 변호사에서 졸지에 후줄근한 아줌마가 된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엄정화 주연의 <미쓰 와이프>도 여배우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군도: 민란의 시대> <해적: 바다로 간 산적> <해무> <명량> 등 남성 영화가 즐비했던 지난해와 견주면 놀라운 역전이다.
단지 여배우 주연 영화가 늘어난 것뿐만이 아니다. 여주인공 캐릭터는 진화했다. 로맨틱 코미디 속 귀여운 여자, 멜로물 속 지고지순한 여자나 남성의 보조 역할에 머물렀던 여성 캐릭터는 식상해졌다. <차이나타운>의 김혜수는 고리대금업과 장기밀매를 업으로 하는 조폭집단의 우두머리로,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암살>의 전지현은 암살 작전을 지휘하는 독립군 저격수, <협녀>의 전도연·김고은은 칼을 쓰는 무협 고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정현은 살인자로 등장한다.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된 것이다.
스크린에서 활약하는 여배우의 나이대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젊고 어린 여배우만 선호하는 분위기, 여자 나이에 대한 보수적 기준은 여배우의 약진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미쓰 와이프>의 엄정화는 “나이가 들수록 여배우가 할 수 있는 배역이 너무 적어 연기를 계속하려면 모든 역을 다 해야 했고 항상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는 20대 김고은·한효주, 30대 전지현·이정현, 40대 전도연·김혜수까지 전 연령대의 여배우들이 스크린을 누비고 있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여배우가 남자배우에 견줘 티켓파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괜찮은 기획들이 거의 없었다”며 “남성을 중심으로 한 비슷한 장르, 비슷한 트렌드의 영화가 반복되다 보니 이에 대한 피로감과 반작용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독특하고 참신한 영화들이 등장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선희 남은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