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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아릿한 팥알이 단팥 되듯, 인생도

등록 2015-09-08 19:00수정 2015-10-28 15:59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앙: 단팥 인생 이야기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신작 <앙: 단팥 인생 이야기>를 보고 좀 놀랐다. 기왕에 만들었던 이 감독의 경향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던 그의 대표작 <너를 보내는 숲>은 내가 좋아했던 영화이다. 자연과의 공감각적 조화라는 거창한 주제가 미시적으로 실현돼 있어서 이런 식으로도 영화가 가능하구나 찬탄했다. <앙 : 단팥 인생 이야기>는 훨씬 이야기 친화적이고 대중에게 친절한 화술을 쓴다.

양손을 다쳐 잘 쓰지 못하는 도쿠에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일본 전통 단팥빵 도라야키를 파는 자그만 가게에 취직해 황홀한 맛을 내는 단팥을 만들어내자 가게가 번창한다는 게 영화의 초반부다. 옛날에는 사회와 격리시킬 만큼 몹쓸 병 취급을 당한 어떤 병을 할머니가 앓았다는 게 차츰 밝혀지는데 예상했던 대로 사태는 비극적으로 흘러간다. 도라야키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 센타로는 인생에 의욕을 잃고 대충 하루하루를 때우는 중년남자인데 매사 호기심이 많고 열심인 도쿠에 할머니의 인품에 감화된 만큼이나 그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인데 스토리보다 중요한 것은 도쿠에 할머니를 연기하는 키키 키린의 명연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 낯이 익었던 이 배우는 걸음걸이, 어딘가 불편한 몸동작, 사람을 만날 때면 반사적으로 짓는 미소의 자연스러움에 이르기까지 관객을 홀리는 마력이 있다. 그런 그가 동네 나무들 사이로 쏟아지는 빛줄기에 감동하거나 나무 꼭대기에 있는 새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흔한 장면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키키 키린의 도쿠에 할머니는 심지어 단팥을 만들 때 팥알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며 사장 센타로에게 팥알들이 밭에서 여기 오기까지 고생을 많이 했으니 극진히 모셔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뻔한 말들일 수도 있지만 말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감응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걸 키키 키린의 표정과 몸짓과 대사를 통해 실감하게 되는 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장면이 있었다. 도라야키 가게 사장 센타로가 도쿠에 할머니를 좋아했던 가게 단골 손님인 소녀와 함께 도쿠에가 머물고 있는 요양원에 방문했을 때 할머니는 친구와 함께 만든 단팥죽을 대접하는데 뜨거운 그 단팥죽을 센타로가 살살 불어가며 먹는 장면에서 나도 주인공과 더불어 눈물이 쏟아졌다. 도쿠에 할머니는 뜨거울 때 먹는 게 맛있다고 연신 권하는데 센타로는 눈물을 참느라 힘들어한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있는 음식과 귀에 들리는 상대의 진심과 이것들을 즐길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라는 감사와 죄책감이 섞이는 기분이 온전히 화면에 전해지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가며 보고 감각하고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남들도 그렇다. 그렇다면 영화 속 할머니 말대로 각자 다 살아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생 뭐 있나. 맛있는 거 나눠먹고 싶은 마음만 각자 있어도 감동적일 것이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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