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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주인공들이 안 나오는 실험

등록 2015-10-27 19:13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장률 감독의 신작 <필름시대사랑>이 개봉했다. 흥행보다는 개봉 자체에 의미가 있는 작품이지만 귀한 시도를 담고 있어 좋았다. 아마 근자에 상영된 영화들 가운데 가장 실험적인 의도를 담은 작품일 것이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이 영화는 1부만 빼고 주인공들이 나오지 않는다. 2부는 유령처럼 필름 카메라의 시선으로 돌아다니는 화면들로 채워져 있고 3부는 1부의 주인공이었던 박해일, 안성기, 문소리 등의 출연배우들이 찍은 기왕의 영화에서 부분적으로 장면을 발췌해 무성영화처럼 자막을 깔고 원래와는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4부의 끝에 가서야 사라진 주인공 박해일이 다시 등장하는데 그는 1부에서 정신병원 환자 안성기가 그랬던 것처럼 악기를 치는 시늉을 한다. 화면에는 마법이 걸리듯 음악이 흐른다.

영화 초반부, 정신병원에서 노인 환자 안성기가 청소부 문소리를 향해 칼을 들고 추격전을 벌이는데 알고 보니 장난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컷 소리가 나자 박해일이 연기하는 조명 조수 청년이 감독에게 영화 이런 식으로 찍으면 안 된다고, 사랑이 뭔지나 아냐고 소리치며 항의한다. 진짜 미친 놈 취급을 당하자 그는 촬영장을 떠나면서 필름 깡통을 훔쳐 사라진다. 영화의 나머지는 박해일의 ‘사랑이 뭔지 아느냐’는 것에 대한 영화적 답변 같다.

특히 필름으로 찍은 2부는 물질적 현존의 감각을 스크린에 불러오려는 듯 침착하고 신비롭다. 일상적인 평범한 사물과 공간을 필름이 기록했을 때 불현듯 환기되는, 살아있는 것과 소멸하는 것과 마모되고 퇴색하는 것의 차이와 경계가 사라지는 듯 신묘한 착각이 든다.

무성영화처럼 자막을 깔고 배우들의 출연 장면을 비틀어 이 영화의 1부 내용에 맞게 재구성하는 3부는 이야기는 문맥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역할을 바꿔 재생되는 캐릭터들의 기운생동을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까지 오면서 관객은 그래서, ‘사랑이란 게 도대체 뭐라는 거야?’ 스스로 질문하게 되는데, 음흉한 장률 감독은 당연히 바로 답을 주지 않는다.

세 차례의 시적인 내레이션이 깔리는 것도 멋스럽지만 이야기에 은유의 안개를 뿌려놓는데, 나는 그냥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악기 연주 시늉을 하는 안성기와 박해일의 몸짓이 모든 걸 꿰는 게 아니냐고 편하게 받아들였다.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걸 들리게 하는 어떤 경지, 그것은 사랑하는 상태의 경지이자 영화를 찍고 보여주는 상태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나는 장률 감독의 영화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사람인데 새 영화를 만들 때마다 그의 예술적 기획력에 조금 놀란다. 오래 전부터 그는 자신이 상업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흥행할 수 있음을 증명하겠다고 했는데 그러기는커녕 흥행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상관없다. 한국 영화계는 여하튼 귀한 예술적 자산을 추가하고 있는 중이니까.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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