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 재개봉 열풍의 한 배경으로 ‘보고 또 보는’ 회전문 관람 효과를 꼽는 시각도 있다. 올레티브이 한 시청자는 1948년 나온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를 무려 1414번을 보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왜 영화를 반복 관람하는 걸까. 영화 많이 보기로 소문난 사람들의 입으로 호기심의 세계에 대해 들어본다.
■ 50번을 넘게 본 영화들
내가 적어도 열번 이상 본 영화들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독의 생각에 존경이 우러나는 영화들이다. 그런 영화들 중 첫번째를 꼽는다면 존 포드의 <아파치 요새>와 데이비드 린의 <밀회>다. 영화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존경스런 영화다. 두번째로는 코언 형제의 <파고>와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이다. 나도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정이 생긴다. 50번 이상, 셀 수 없이 많이 본 영화들은 걸작은 아니다. 오로지 취향과 추억 같은 개인적인 애정으로 보는 것이다. 세르조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와 <석양의 갱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트>와 리샤오룽(이소룡)의 <맹룡과강>, <용쟁호투>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극장 또는 티브이 <주말의 명화>에서 본 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년 두어번 이상씩 보는 영화들이다. 어린 시절 나는 이 영화들을 가지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보고 또 보아서 머릿속 기억으로 소유할 수 밖엔 없었다. 끔찍한 이 세상에서 위안 또는 휴식을 주는 영화들이다. 어린 시절 이 영화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오승욱 <무뢰한> 감독
■ 영화 <황해> 15번 재관람기
나홍진 감독의 영화 <황해>는 모두 15번을 다시 봤다. 극장에서 3번, 브이오디로 7번, 디브이디방에서 5번 봤다. 재관람의 이유로는 제법 높은 영화의 완성도나 충격적 인상 탓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보면 볼수록 장르의 특성이 바뀌는 재미 때문이다. 이러한 재관람기의 역사를 1, 2, 3차 시기로 구분해 말해보겠다. 우선 1차 시기. 하드고어의 시대다. 칼 한 자루로 피가 튀기고 비명이 폭발한다. 잔인의 미학으로 따지면 전작 <추격자>를 넘어서며 한국 영화 사상 하드고어 베스트에 꼽을 정도라고 본다. 2차 시기는 스릴러로 바뀐다. 쫓고 쫓기는 자의 관계가 복잡한 실타래처럼 뒤엉키며, 이에 따라 복수의 대상마저 모호해진다. 스릴러의 묘미가 느껴졌다. 그런데 마지막 3차 시기는 좀 엉뚱하다. <황해>가 휴머니즘 드라마로 변해 있는 게 아닌가. 살아있는 것, 그 처절함에 대한 고백으로 읽히는 최종적 변화가 <황해>의 재관람기 특징이라고 이 또한 고백해 본다.
주원규 <열외인종 잔혹사> 작가
■ 10년 동안 반복 관람한 이유
오랫동안 <데드 맨 워킹>이란 영화를 생각할 때마다 캄캄한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런데 막상 그 영화를 다시 봤을 땐 어디서도 그런 장면을 찾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 총성이 울리던 장면을 나는 폭풍우가 치던 밤이라는 이미지로 착각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심리는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과 같을 수 있다. 단기기억 상실자인 <메멘토> 주인공은 아내를 죽인 살인범에게 복수를 위해 살인을 하고 그 기억이 사라지면 다시 복수를 꿈꾼다. 우리의 지각과 인지 과정은 그토록 왜곡이 쉽다. 많은 영화를 수없이 보고 또 보았던 내게 그중 특별한 영화를 묻는다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만화영화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른 채 영화를 볼 때마다 늘 비슷한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 어느날 갑자기 그 답이 찾아왔다. 주인공 소피의 뒷모습에서 나는 나의 20대를 보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두근거림을 볼지 모르지만 나는 혼자 공터에 앉아 스스로를 달래던 외로운 시절의 나를 반복 탐구해 왔던 것이다. 이 영화는 2004년에 처음 개봉했지만, 10년 동안 수십번을 보고난 후에 그 의미를 알게 됐다.
박소진 한국인지행동심리학회 대표
오승욱 <무뢰한> 감독
주원규 <열외인종 잔혹사> 작가
박소진 한국인지행동심리학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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