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도심 공원만 찾아도 단풍과 낙엽에 와락 눈물이 날 지경인가 했더니, 26일엔 서울에도 제대로 된 첫눈이 내렸다. 때가 때이니 만큼, 달달하면서도 때로 씁쓸한 로맨스 영화 한 편 어디 없나….
요즘 극장가에 로맨스 영화가 기근이다. 특히 신작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로맨틱 코미디인 윤계상과 한예리 주연의 <극적인 하룻밤>(감독 하기호, 12월3일 개봉)이 거의 유일한 예외로 꼽힌다. 미국 영화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와 일본 영화 <서툴지만, 사랑> 등이 12월10일 한꺼번에 개봉하지만, 관객의 기대감을 얼마나 채울지 미지수이다. 윤계상도 지난 25일 <극적인 하룻밤> 시사회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요즘 무거운 영화가 많다. 로맨틱 코미디는 이 영화 하나인 것 같다”고 했다.
이런 현상은 올해만의 일은 아니다. 지난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11월27일 개봉해 노부부의 애잔한 사랑 이야기를 선보여 384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지만, 다큐멘터리였다. 지난해 1월 개봉한 <남자가 사랑할 때>(주연 황정민, 한혜진)가 있었지만, 조폭이 사랑에 눈을 뜬다는, 달달함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2013년은 그래도 나았다. 12월 초에 개봉한 <어바웃 타임>이 285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고, 11월 하순 개봉한 <결혼전야>(감독 홍지영)는 121만의 관객이 크리스마스 시즌의 데이트 영화를 찾았다. 씨제이 이앤엠 관계자는 “영화계의 최고 성수기는 12월 중순 이후로, 큰 영화들이 이를 노려 개봉한다. 그래서 11월말에서 12월 초에 작지만 달달한 영화를 나오게 마련인데, 올해는 이상하리 만큼 로맨스 영화가 적다”고 말했다.
어쩌다 로맨스 영화의 가뭄이 들었을까. 영화계에선 ‘장르 쏠림’ 현상을 첫번째 이유로 꼽는다. 김윤석과 하정우가 열연한 <추격자>(2008) 등의 성공으로 스릴러 장르 영화가 유행하고, 올해 <베테랑>(감독 류승완), <내부자들>(감독 우민호) 등의 흥행이 보여주듯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들이 잇달아 극장에 내걸렸다. 정지욱 평론가는 “베테랑과 내부자들 등 뭔가 임팩트 있는 영화 쪽으로 제작자들이 몰리고 있는 것 같다. 한 때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았던 것처럼 일종의 유행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영화관에서 로맨스가 완전히 실종된 건 아니다. 지난해 8월 개봉해 300만명이 넘게 동원한 <비긴 어게인>은 음악영화임에 분명하지만, 로맨스가 녹아있다. 그뒤 개봉한 여러 음악영화들도 대부분 연인들이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다른 장르 영화의 ‘양념’으로 로맨스는 단골 메뉴다. 최근 개봉한 <도리화가>에서도 배수지와 류성룡 사이의 러브라인이 살짝 비친다. 올해 초 흥행한 <스물>은 젊은이들의 이야기인 만큼 연애가 빠질 순 없다.
잘 만든 로맨스 영화를 만들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한효주 주연의 <뷰티 인사이드>는 여름인 8월에 개봉해 205만 관객을 동원해, 로맨스 영화에 대한 수요의 존재를 증명했다. 의외로 흥행에 성공한 <어바웃 타임> 등의 사례를 봐도 잘 만든 로맨스 영화는 관객들이 찾게 마련이다. 지난 5일 10년만에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도 22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선전하고 있다.
로맨스 영화의 주요 관객층인 20대의 변화를 근본적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엔(N)포세대’라는 말이 표현하듯, 요즘 20대는 연애조차 포기한 것인지 모른다. 로맨틱 코미디인 <극적인 하룻밤>에서조차 비정규직이라 연애를 포기하려는 모습이 그려진다. 황진미 평론가는 “예전에는 20대 연인이 극장을 찾는 게 데이트 코스였지만, 요즘 20대는 연애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더라도 영화관을 찾을 돈과 시간이 없다. 로맨스 영화의 수요가 예전만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