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맨 프롬 엉클>은 진부한 영화적 형식까지 60년대를 흉내 내고 있지만, 키치적인 레트로 미학은 즐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맨 프롬 엉클
맨 프롬 엉클
그런 영화들이 있다. 아무리 변호를 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재미가 없는데 도무지 싫어하기란 불가능한 영화들 말이다. 사람들이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술적이든 예술적이든 거의 모든 부분들이 다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심각하게 꽂히는 단 하나의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나로 말하자면 그건, 레트로다. 이를테면 올여름 가장 끔찍할 정도로 망해버린 가이 리치 연출작 <맨 프롬 엉클> 같은 영화 말이다.
<맨 프롬 엉클>은 동명의 1960년대 티브이 시리즈를 영화로 리메이크한 스파이 액션 영화다. 그런 면에서는 역시 고전 티브이 시리즈를 영화로 다시 만든 <미션 임파서블>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티브이 시리즈와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세계 평화를 해치려는 비밀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냉전시대의 적인 서방과 소련 출신 스파이가 힘을 합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맨 프롬 엉클>의 전략은 <미션 임파서블>과 완전히 다르다. 후자가 원전을 완전히 해체한 뒤 새로운 시대의 블록버스터에 맞게 재조립했다면, 전자는 그냥 원전을 따른다. 그렇다. 재해석이고 뭐고 없다.
물론 이야기를 원전 그대로 두는 것도 좋은 전략일 수 있다. 냉전시대가 끝나긴 했지만 냉전은 여전히 훌륭한 영화적 재료다. 지구가 두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를 잡아먹으려 안달을 하던 시대다. 선과 악은 각자의 입장에서 매우 분명했다. 지금처럼 전세계가 수많은 종교와 민족의 내전으로 갈가리 찢어진 상황에서는 오히려 냉전시대가 더 로맨틱해 보이는 효과도 있다. 냉전이 로맨틱하다니 이 무슨 유신시대가 로맨틱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소리냐며 짜증을 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과거는 어쩔 도리 없이 정치적 공정성을 뛰어넘는 로맨티시즘의 가면을 쓰게 마련이다. 그냥, 과거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맨 프롬 엉클>의 문제는 심지어 영화적인 형식까지 60년대 영화를 흉내내고 있다는 거다. 주인공들은 지나치게 쉽게 악의 근거지에 잠입하고, 너무나도 쉽게 단서를 찾아내고, 악당에게 잡혔다가도 너무 간단하게 탈출하고, 결국 클라이맥스 액션이 폭발해야 하는 상황에서 감독은 화면을 60년대 스타일의 분할 화면으로 쪼개면서 로맨틱한 음악을 집어넣고… 하여간 모든 게 너무 여유롭고 느리다.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로 돌아가 그 시절 관객들에게 보여준다고 해도 이걸 미래에서 온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두명의 떡대 좋은 스파이들이 60년대의 로마 부티크에서 여자주인공에게 디오르를 입히네 마네로 싸우고 있는 꼴을 보면서 이 스파이 영화의 키치적인 레트로 미학을 즐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핵폭탄이 터지는 건 둘째 문제다. 관객에게도 그건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지금 디오르를 입느냐 마느냐로 고민 중인데 뭔 쓸데없는 핵폭탄 타령이람.
비슷한 이유로 나는 앤절리나 졸리와 조니 뎁의 그 역사적인 망작 <투어리스트>를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프랑스 영화 <안소니 짐머>를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오래된 히치콕 영화를 그대로 다시 만든 것 같은 액션 스릴러인데, 지나치게 유유자적해서 할리우드 여름 블록버스터 주제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성기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처럼 빛나는 앤절리나 졸리가 온갖 드레스를 입고 베네치아(베니스)를 활보하는 걸 보며, 영화의 줄거리야 어떻게 흘러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오션스 트웰브>는 또 어떻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리즈 중 최악으로 꼽은 이 영화에는 사실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줄거리 기억나시는 분?) 패션지에나 나올 만한 옷을 걸친 조지 클루니, 줄리아 로버츠, 캐서린 제타존스, 브래드 핏, 맷 데이먼이 유럽의 호사스러운 도시들을 돌아다니는 가운데, 재즈, 칸초네와 프렌치 팝이 팡팡 터지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할리우드 고전의 흉내 내기다.
그렇다. <맨 프롬 엉클>과 <투어리스트>와 <오션스 트웰브>는 영혼이라곤 없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나는 영혼이 꼭 머릿속이나 심장에만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보그 편집장 애나 윈투어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당신의 경쟁자를 이길 수 없다면, 옷이라도 더 잘 입어라”라고. 만약 당신이 경쟁작보다 더 나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면, 스타일이라도 끝내주게 뽑아라. 그게 속편을 만들 만한 흥행을 보장해주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이 영화들은 잘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애초에 없는 영화들이었다. 그러니 번들거리는 가죽이나마 영화 역사의 한 챕터에 조그맣게 남기는 건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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