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뜻깊은 개봉 영화 ‘귀향’
80년의 고통, 25년의 싸움, 14년 만의 개봉. 영화 <귀향>은 먼저 숫자로 말할 수 있는 영화다. 7만5270명 시민이 11억6122만원 제작비를 모아 만들어진 영화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간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귀향>이 24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수많은 피해자 중 238명만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정부에 등록되었고, 현재는 46명만이 생존해 있다. 영화는 그 중 강일출 할머니(89)가 겪은 일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후퇴하는 일본 군대가 퇴각에 거추장스러운 위안부들을 산속으로 끌고 가 구덩이에 몰아넣어 죽이고 주검은 불태운다. 강일출 할머니는 구덩이에서 죽기 직전 독립군에게 구출돼 살아남았다. 2002년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조정래 감독은 강 할머니가 심리치료 과정에서 그린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을 보고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오랜 세월 제작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던 이 영화는 시민 후원금으로 제작비 절반을 모으면서 촬영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영화 맨 마지막 8분 동안 7만5270명의 후원자 이름이 흐르는 순간은 어떤 대작도 만들어낼 수 없는 이 영화만의 스펙터클이다. 배우 손숙, 오지혜, 정인기 등은 출연료를 받지 않았다. 잔인한 일본 장교 역을 맡은 임성철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외종손이다. 임성철씨는 우연히 이 영화에 대해 알게 된 뒤 미술감독에다 프로듀서를 맡으며 영화의 산파 노릇을 했다.
‘위안부 피해’ 강일출 할머니 실화 토대
일본군에 끌려간 소녀 ‘정민’ 그려내
돌아오지 못한 원혼들 ‘씻김굿’이기도 7만5270명 후원으로 14년만에 개봉
조정래 감독 “넋들 고국으로 데려오려”
그러나 <귀향>은 잔인한 역사적 사실이나 선한 의지만 강조하는 교과서 같은 영화가 아니다. 논 일 갔다 오는 아버지(정인기)는 툭하면 딸을 지게에 태워 돌아오곤 했다. 어머니(오지혜)는 14살 소녀에게 괴불노리개를 달아주며 어떤 부정한 것도 접근치 못하길 빌었다. 이렇듯 곱고도 귀한 자식들이 어느날 트럭에 실려 중국 무단장(목단강) 위안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일본군 장교는 칼을 뽑아들고 “너희는 인간이 아니다. 다만 황군을 위한 암캐”라고 위협한다. 소녀들은 “우리는 끌려오던 순간에 이미 죽었고, 여기는 (죽은 자들이 떠도는) 지옥”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1943년 경상남도 거창의 한 마을에서 갑자기 일본군에게 끌려간 소녀 정민(강하나)의 이야기를 신내림을 받은 1990년대 소녀 은경(최리)의 사연과 교차시킨다. 그럼으로써 풀리지 않던 역사는 현재와 만난다. 성폭행을 당한 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혔던 은경은 낯선 땅에서 짓밟히고 죽어간 위안부 피해자들의 혼과 접신하면서 그들의 말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 된다. 성폭행 피해자가 전쟁범죄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영화는 여자들이 어떻게 서로의 아픔에 공명하며 피해자에서 치유자로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에너지는 바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씻김굿의 분위기, 스스로를 내주어 원혼들의 증언자이면서 영매가 되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온다. <귀향>이라는 영화 제목부터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이 아니라 ‘귀신들의 고향’을 의미한다고 한다.
개봉에 앞서 이미 미국과 한국에서 후원자 시사회를 가진 조정래 감독은 “영화를 만든 사람 입장에선 시사회 자체를 씻김굿으로 여긴다. 우리가 20번 시사회를 열면 20명의 원혼이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믿는다”고 했다. “타지에서 숨진 위안부 피해자들의 넋을 고국으로 데려오자”는 뜻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영혼 하나하나를 나비로 표현해 그들이 나풀거리며 속살거리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정경을 그린다. 무속적인 분위기를 위해 영화는 치열한 교전이나 잔인한 학살 장면 만큼이나 노래와 춤에 공을 들였다. 굿판을 주도하는 은경 역을 맡은 최리는 한국무용을 전공한 배우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장면들을 보면 감독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순교자이며 우리가 역사에 지닌 원죄를 일깨우는 존재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제 곧 다 안끝나겠나.” 영화에서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위안부 할머니 영옥(손숙)은 시시때때로 중얼거리지만 현실에선 할머니들의 수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조정래 감독은 “이 영화가 할머니들을 대신해서 말할 수 있는 문화적 증거로 작동하길 바란다”고 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일본군에 끌려간 소녀 ‘정민’ 그려내
돌아오지 못한 원혼들 ‘씻김굿’이기도 7만5270명 후원으로 14년만에 개봉
조정래 감독 “넋들 고국으로 데려오려”
사진 ㈜와우픽쳐스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