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고민…줄타기. 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차승원은 인터뷰 내내 이 단어들을 반복했다. 그는 7일 개봉하는 영화 <고산자>(감독 강우석)에서 ‘대동여지도’를 만든 지리학자 김정호를 연기했다. 올해로 배우 데뷔 20년, <혈의 누>(2005),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등 사극이 처음도 아닌데 그는 유독 신중했다.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는 위인에 접근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역사와 팩션 사이에서 중간 지점이 어딜까를 고민하며 끊임없이 줄타기해야 했다.” 그는 “배우가 아무리 열심히 연기해도 실존 인물의 아우라를 다 좇아갈 수는 없다. 그 부담감이 시작부터 지금까지 있다”고도 했다.
팔도 유랑, 백두산 등정 등 영화에 표현된 김정호의 고투가 실은 당대 조선 지리학의 수준을 깎아내리고 조선 조정의 무능을 강조하려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기초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최근 학계의 비판적 해석도 부담스러울 법하다. 그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영화라는 게 오로지 팩트만 가지고 할 수는 없다. 백두산을 올라가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19세기에 그토록 정교한 지도를 만든 분 아닌가. 민족의 명산이랄지 팔도의 명소들은 가보지 않았을까. 흥선대원군과의 만남도 그렇다. 최고권력자인 대원군이 엄청난 지도를 만든 사람을 한 번 정도는 만나지 않았을까 추정해보는 거다.”
이렇게 고민스러운 영화를 그는 왜 선택했을까.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위대한 업적은 모르겠고, ‘사람 김정호’는 내가 표현할 수 있겠다는 나름의 믿음이 있었다. <어벤져스>처럼 캐릭터들이 우루루 나오지 않고 오롯이 한 인물만을 다루는 기회도 별로 없지 않나.”
그가 그린 ‘사람 김정호’는 그의 말마따나 “비범하되 평범하”다. 돈도 안 되는 지도에 미친 ‘지도쟁이’는 팔도를 누비다 3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와선 딸의 얼굴도 못 알아본다. 비범함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이런 헐렁함이 관객으로 하여금 김정호에게 마음을 내주게 한다. 차승원은 “대본에서 김정호는 좀더 심심했는데 나는 인물을 해학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인기 예능 <삼시세끼>로 친숙해진 ‘차줌마’ 캐릭터가 영화 속에서도 드문드문 묻어난다. 그래도 영화 속 ‘삼시세끼’ 운운한 대사는 절대 자신의 애드리브가 아니라며 억울해했다.
영화 도입부 백두산 천지 장면 촬영 땐 “저절로 두 손이 합장되더라”며 “왜 애국가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지 알겠다”며 눙을 치기도 했다. 그는 <고산자> 촬영을 위해 최남단 마라도에서 합천 황매산, 여수 여자만 등 9개월간 10만6240㎞를 누볐다. 유난히 걷는 장면이 많은데 보폭이 크되 재빠른 느낌은 아니다. 그는 “신념 있게, 힘차게 걸어보자”고 생각했단다.
오늘날 ‘고산자 김정호’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꽤 길고 개인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전에는 남의 불행에 그다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평온하기 위해선 주변사람과 사회가 편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에 애정을 가지고 뭔가 베푼다는 게 쉽지는 않더라. 김정호가 목판을 만든 이유는 지도를 대량생산하기 위해서다. 기득권층에 붙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런 희생이 다 사랑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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