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콜라
영화를 사랑하세요? 라고 약간 닭살스런 질문을 누군가 던진다면 나는 ‘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는 주저함이 섞인다. 최근 내가 ‘영화’보다 ‘휴식’을 더 사랑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와 휴식은 반대말이 아니다. 영화 기자를 하기 전 내 사전에도 영화 관람은 휴식과 같은 계통의 단어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각종 회고전이나 크고 작은 영화제 스케줄표가 빼곡한 주말,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은 대체로 휴식에 패배하고야 만다. 샤브롤, 안토니오니, 알드리치 등 거장 감독들의 특별전 따위가 전에는 호기심이나 흥미 유발의 요소였다면 지금은 ‘봐야 하는데’ ‘챙겨야 하는데’라는 의무감으로 다가오는 탓이다. 숙제라고 생각하니 의욕은 더 상실되고 소심한 탓에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결국은 볼까말까, 봐야 되는데 이러다가 번번이 ‘그냥 잠이나 자자’로 끝나는 주말을 보내고 ‘역시 영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라는 자괴감어린 결론으로 끝맺는다.
그럼에도 ‘영화를 사랑하는 편’에서 퇴출을 권고한다면 거부하겠다. 사랑(연애)의 방식이 백인백색인 것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방식도 여러가지가 아니겠는가. 지난 10월30일 메가박스 1관은 아침 8시에 488석의 좌석이 꽉 찼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듀얼리스트>의 팬들이 영화를 다시 보기 위해 극장에 모인 것이다. 물론 <형사>의 상영은 이미 지난 달 끝났다. <형사>를 사랑했던 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극장을 대관했다. 인터넷 홍보를 위해 만들어졌던 <형사> 카페에 모인 팬들은 종영과 함께 공식 활동이 종료된 상황에서도 떠나지 않고 영화에 대한 애정과 예상보다 이른 종영에 대한 아쉬움을 공유하다가 급기야 ‘우리끼리 모여서 다시 <형사>를 보자’며 의기투합을 하게 됐다. 팬모임의 운영자인 직장인 김민진(25)씨는 무려 23번이나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지만 ‘보고 또 보고’ 싶어 사람들을 모으고 극장 대관과 이명세 감독 초청까지 직접 나섰다. 2001년의 ‘와라나고’ 운동 (<와니와 준하>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재개봉 촉구 운동)이나 <돌려차기>의 재상영 요구 등 팬들이 좋은 영화 살리기에 나선 적은 여러번 있지만 팬들이 쌈짓돈을 모으고 극장을 빌려 ‘영화 사랑’을 확인한 것은 <형사>가 처음이다.
이처럼 한편의 영화에라도 마음과 몸이 움직인다면 당당하게 ‘영화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런데 워낙 영화가 대중적인 오락거리이고 또 영화광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다 보니 영화를 좋아한다는 건 마치 취미가 독서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식상한 표현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 영화를 사랑한다면 공인된 걸작이나 감독들을 줄줄이 꿰야한다는 이상한 강박이 생기는 듯하다. 그러나 좀 게으르면 어떻고 지식이 좀 부족하면 어떤가. 내 비록 이번 주말에도 ‘독일 표현주의의 거장’ 무르나우 감독에게 마음 깊이 사과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11월5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회고전) 그래도 부끄럼없이 고백하련다. 영화야 사랑한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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