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필요하다. ‘쓸 데 없는 풍경’이 우리에겐 가끔 필요하다. 현재의 내 안에 뭔가 새로운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여행 에세이에 이렇게 적어뒀다. 묵혀둔 일기장을 꺼내 보는 일처럼,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는 일도 그 여행이 아닐까. 우연히 마주친 ‘쓸 데 없는 풍경’들로, 다시 ‘뭔가 새로운 것’을 느낄 수도 있는. 여행의 두 가지 풍경은 이렇다.
하나. 조엘(짐 캐리)은 지난 사랑의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성격도, 행동 양식도 반대였던 여인이었다. 이미 그 여인은 ‘이별 치레’를 견딜 수 없어, 기억 삭제 장치를 개발한 회사에서 조엘과의 기억을 없애버렸다. 이 장치는 같은 과정을 밟기로 한 조엘의 기억 인자들도 하나하나 추적해 파괴한다. 성격 차이 때문에 점점 거세졌던 여인의 말소리도 지워지고, 2년 전 몬타우크 해변에서 처음 보자마자 당돌하게 말을 걸어왔던 여인의 잔상도 부서진다. 에누리 없이 잊고 싶던 그에겐 한없이 ‘쓸 데 없는 풍경들’. 그러나 기억을 파괴하기 위해, 기억을 되짚어가는 ‘여행길’에서 이미 늦었지만 조엘은 욕망한다. 여인의 기억을 지울 순 없다고, 지우고 싶지 않다고.
둘. 사랑의 기억이 지워진 조엘이 몬타우크 해변으로 불현듯 여행을 떠난다. 마찬가지 공허감으로 가득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도 바닷가를 거닌다. 우연히 만난 둘은 서로에게 퍽 ‘쓸 데 없는 풍경’처럼 보인다. “내가 착한 것도, 남이 착한 것도 싫다”는 클레멘타인에게 한없이 착하고 소심한 조엘이 그렇다. “워낙 사는 게 밍밍하다”는 조엘에게 클레멘타인은 당돌하고 충동적이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그때문에 ‘뭔가 새로운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끌림 내지 홀림 정도 되는. 둘은 그렇게, 사랑을 시작한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 두 ‘여행’으로 짜여 있다. 물론 조엘이 지운 여인도 동일인, 클레멘타인이다. 조엘이 옛 사랑의 기억을 지운 뒤 클레멘타인을 만나는 지점은,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2년 전 처음 만나 사랑을 시작하게 된 지점을 닮아있다. 왜 망각한 기억이 복기 되는가. 사랑의 기억 인자는 기실 머리가 아닌, 가슴 속에 붙박이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닮은 꼴로 반복되는 두 사랑의 시간적 선후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해 보인다.
어쨌건 이 두 풍경의 순서가 뒤바뀐데다, 조엘의 현재하는 시선을 좇지 않고 기억 속 의식의 흐름을 좇기 때문에 영화는 다소 복잡해지고 몽환적이다. 하지만 염려할 필요는 없다. 모두 말해주기 때문이다. 짐 캐리의 깊은 눈, 낮은 ‘도’계명에 내려앉을 법한 음성, 사랑을 잃고 떠는 몸짓들이 그야말로 매끄럽게 사랑의 연원을 납득시켜준다. 설령 순서가 헷갈린대도 상관 없지 않을까. 어차피 사랑은 시간 순으로 흘러가는 영화가 아니라, 어지럽게 흐트러진 여러 장의 스틸 컷들로 서두 없이 기억되질 않는가.
<존 말코비치 되기>로 기발한 상상력을 자랑했던 찰리 카우프만(원작)과 유명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 미셸 공드리(연출)의 <휴먼 네이처>(2001년)에 이은 두 번째 울력 작품이다. 1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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