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에서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가 즐겁게 술을 마신다. 여자는 취해 있다. 나이 든 남자는 젊은 여자를 유혹하려 몸이 달아 있다. 여자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남자들은 늑대 아니면 아기 같은 존재라고 여자는 말한다. 대다수 남자는 늑대이자 아기이다. 자기 편리한 대로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여자도 그걸 모를 리 없다. 여자는 상대편 남자에게 당분간 늑대일 것이냐, 아기일 것이냐, 어느 편을 연기할 거냐고 묻는 것이다. 남자는 바짝 무릎을 꿇는다. “최선을 다할게요.” 여자가 승자의 입장에서 다음 말을 기다리자 남자는 덧붙인다. “예의도 다 지키고, 모든 걸 다할게요. 제대로.” 여자는 ‘나이 먹은 남자가 귀엽다’고 칭찬해준다. 남자는 고맙다고 말한다. 여자의 말에 최후의 화룡점정이 찍힌다. “눈이 아직 힘 있어 보여요.”
10일 개봉하는 홍상수의 신작 영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 나오는 장면들은 그의 영화를 꾸준히 봐온 관객들에게는 익숙하고 살짝 새롭다. 남녀 주인공들은 서로 짝을 달리해 구애하고 대개는 실패하며 어쩌다 성공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 김영수(김주혁)는 룸펜 예술가인데 아마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남들에게 딱히 자기 직업을 밝히지 않고 그냥 논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 직업적 정체성을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게는 결혼할까 약간 고민 중인 애인 소민정(이유영)이 있는데 이 여자는 술을 무척 좋아한다. 남자는 여자의 음주를 비난하는데 실은 여자가 다른 남자와 술을 마시는 걸 싫어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선배 김중행(김의성)에게서 소민정이 다른 남자와 술 마셨다는 제보를 받은 김영수가 자기 집에 자러 온 소민정을 심하게 비난하면서 헤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다음부터 소민정은 다른 남자들을 계속 만나고 김영수는 연락이 닿지 않는 소민정을 찾아다닌다. 소민정은 연애하고 김영수는 방황한다.
이번에도 홍상수 영화에서 구조는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상황은 반복되고 대구를 이루며 차이에서 충격이 일어난다. 맨 처음에 언급한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 후반에 나온다. 젊은 여자 소민정은 영화감독 이상원(유준상)과 술자리를 갖는데 태도가 다르다. 소민정은 지금까지 이상한 사람들에게 꽂혀서 인생을 망쳤다고 하소연한다. 즉, 소민정은 앞서와 달리 먼저 남자를 유혹한다.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여기서도 남자는 늑대의 본성을 누르고 귀염받고 싶은 아기처럼 양순하게 군다. 여자가 건강해 보인다고 하자 남자는 으쓱대며 말한다. “몸은 자신있습니다.” 소민정의 유혹 장면 뒤에 붙는 것은 소민정을 찾아다니다 지쳐 지인들과 술을 마시거나 혼자 술을 마시는 김영수의 추레한 모습이다. 김영수는 아기처럼 징징댄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중요한 게 아니라며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말하는 김영수는 정작 마음이 중요하다는 그 말을 해줄 사람이 보이지 않아 징징댄다. 몇 차례 소민정이 그를 향해 반응하는 장면이 불쑥 나오지만 알고 보니 다 김영수가 헛것으로 본 장면이었다.
이쯤 해서 제목과 연관 지어 떠올릴 수 있는 이 영화의 비장의 한 수가 나온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은 같은 건가 다른 건가. 같은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소민정은 남자들이 접근해올 때마다 자신을 부정한다. 남자들이 이름을 부를 때 그 호명을 부정한다. 자기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쌍둥이 언니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게 거짓말인지 아닌지 영화는 확증해주지 않는다. 아마 거짓말일 것이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술에 취해 징징대는 김영수에게 그의 지인인 어느 여자는 사람은 다 똑같다며 남자들이 불쌍하다고 말한다. 남자들은 여자가 신비롭기를 바라며 늑대의 본성을 누르고 아기처럼 양순하게 연기한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연기술을 꿰뚫고 있다. 동시에 여자들도 연기한다. 적어도 이 영화 속 소민정은 그렇다.
밝힐 수 없는 결말에선 홍상수 식의 마술이 또 나온다. 소민정은 끝까지 자기 정체를 부정하는 가운데 회개하는 김영수와 재회한다. 타자의 무한을 긍정하는 결말이라고만 해두자. 타자는 자기 식으로 규정할 때 유한하지만 규정하지 않으면 무한하다. 무한한 타자는 오랫동안 경이적인 존재이다. “고마워요. 당신이 당신인 게.” 영화 속에서 김영수가 말한다. 예술가로서의 홍상수와 개인으로서의 홍상수가 일치해서 낸 말이 바로 이 말이 아닐까.
김영진/영화평론가·전주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