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인터뷰
영화 <판도라> 박정우 감독·원전 노동자역 배우 김남길
영화 <판도라> 박정우 감독·원전 노동자역 배우 김남길
오래 숨길 수는 없었다. 촬영을 마친 지 1년이 넘었지만 그동안 언제 개봉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감독과 배우들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11월9일 제작보고회와 29일 언론시사회를 거치면서 배우와 감독들의 말은 점점 뜨거워졌다. <판도라> 박정우 감독과 주연 김남길을 만나 영화 제작 과정과 지금 시국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박정우 감독 “눈물보단 분노를 원했다”
-4년 전에 쓴 시나리오가 지금 현실과 너무 똑같아 오히려 덜어낸 부분이 많다고 들었다.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다녀온 사이 총리가 비서관과 수석들을 포섭해 주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을 보고 대통령이 ‘대체 이 나라는 누가 이끌고 가는 겁니까?’ 하소연하는 부분이 있었다. 영화 후반부에 총리가 ‘대통령은 지금 판단 능력을 상실하셨어요’ 하는 대목도 있었다. 최근 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된 뒤 촬영 부분을 덜어냈다. 원전 사고가 악화일로를 치닫는 순간 대통령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저에 틀어박힌 장면도 세월호 7시간 관련 보도를 보면서 뺐다. 내가 책에서 가장 좋아했던 대목이 원전 사고 희생자들이 ‘이게 나라입니까, 내가 죽어서도 지켜볼 겁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었는데 그로부터 2년 뒤 세월호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다. 그래도 미련 때문에 촬영까지 했는데 역시 편집할 때 뺐다. 내 의도는 정권 비판보다는 원전에 무감한 우리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이었기 때문에 똑바로 읽히지 않겠다 싶으면 과감히 덜어냈다. 원래는 정권 바뀔 때까지 개봉 못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고 내 꿈은 대선 직전 개봉해서 원전 관리가 대선 정치공약이 되는 것이었다.”
-재난영화에선 컴퓨터 그래픽, 사실적 묘사 등이 영화의 수준을 가르는데.
“후쿠시마 대지진을 보면서 만약 한국에서 이런 사고가 나면 어떻게 될까 세밀하게 가상도를 그렸다. 그 과정에서 방사능 전문가와 법률 및 제도 전문가의 자문을 꼼꼼하게 받았고, 후쿠시마 원전 백서와 사고 보고서를 참고했다. 보고서에도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사실을 은폐하고 남아 있던 직원들이 발전기를 다시 돌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나온다. 한국적 현실에 맞게 고친 부분조차도 실제 가동 중인 원전들을 모두 현지 조사해 반영했다.
컷수로 치자면 컴퓨터 그래픽이 전체 영화의 60% 정도를 차지하는데, 부족하지만 역시 리얼리티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원전 붕괴 사실이 알려지고 부산역에서 사람들이 기차를 타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장면에 하루, 선착장, 인천공항도 각기 하루씩 찍었다. 영화에선 몇초 새 지나가는 장면을 위해 모두 7000명을 동원했다. 원자로는 컴퓨터 그래픽이지만 기본 자료는 필리핀 원전 원자로에 몰래 들어가 촬영해 온 것이다.”
-막판 15분의 눈물극에 대해 비평이 엇갈리고 있다.
“신파라는 소리는 섭섭하다. 영화 중간 울리려고 한 적이 있긴 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언제까지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하며 우리는 왜 국가의 보호 없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지 분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웃기는 건 내 특기지만 웃기지 않았고 재난영화 공식에 맞는 뻔한 이야기도 뺐다. 관객들이 현실로 느끼기를, 극장에 눈물바다가 아니라 분노가 있길 바랐다.”
주연 김남길 “영웅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배우들이 찍힐까봐 이 영화를 기피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출연을 결정했다.
“배우 입장에선 시나리오를 보면서 한두 장면에 꽂히는 게 가장 크고, 사회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은 부수적이다. 나는 고발영화로 여기지는 않았다. 나는 외압은 신경 안 쓴다. 위에서 보고 있다고 해서 부담스럽고 앞으로 영화를 못할 가능성이 높다면 영화를 안 하면 되지. 청개구리 같은 스타일이라서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다. 각자가 일하는 위치에서 내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한데 배우라고 예외는 아니다.”
-마지막 장면은 배우라면 탐낼 만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감독님과 절대 멋있어 보이면 안 된다고 다짐하며 찍었다. 나 같아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되는 딱 그 정도만 했다. 쿨한 할리우드의 영웅들과는 달리 재혁이는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 지금 내가 갖는 가장 큰 부담은 경주 지진을 홍보에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이고 시국과 어우러져 내가 거창해 보일까봐 부담스럽기도 하다.”
-경상도말로 연기한 것을 포함해 다른 작품에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사투리 선생님을 두고 오랫동안 배웠는데 어느 날 부산역에서 택시 타고 경상도말로 말을 걸었더니 기사님이 웃으면서 서울에서 오셨지예 그러더라. 그때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경상도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는 없겠다, 크게 어색하지 않게 하고 정서적 전달에만 집중하자고 목표를 세웠다. 재혁이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살도 찌우고 씻지도 않은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분진 가루를 묻힐수록 외모가 더 살아난다고들 했다.(웃음) 촬영 끝나고도 그러고 다녔는데 다들 연예인인 줄 모르더라.”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박정우 감독. 뉴(NEW) 제공
주연 김남길 “영웅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배우 김남길. 뉴(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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