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배우 대니 트레조./필진네트워크 박형준
존 말코비치와 게리 올드만, 우리는 그들을 '카리스마의 화신'이라고 부른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그들은 지금까지 선한 이미지를 대변하는 주인공을 능가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 연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악인이라고 반드시 카리스마의 화신이란 법은 없다. 시쳇말로 '싸이코'라고 부르는 독특한 이미지의 악인들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고전적인 악역 연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악역 배우들도 존재한다.
이렇듯 보통 사람들 못지 않게 다양한 색깔의 악역 연기들 속에서 어떤 색깔이든 악역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바로 자연스러움이다. 관객들은 몸에 녹아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좋아한다. 연기를 잘 하는 배우란 연기가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배우를 말한다.
지금부터 소개할 '악인'들도 게리 올드만이나 존 말코비치처럼 크게 주목받는 배우들은 아니지만, 몸에 밴 악역 연기, 혹은 정상인과는 동떨어진 특이한 인물에 대한 연기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어필을 했던 배우들이다.
대니 트레조
한때는 그의 삶 자체가 '악역'이었다. 대니 트레조는 그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나 B급 영화들을 자주 감상했던 관객이라면 얼굴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는 배우다. <콘 에어>에서는 여자 교도관을 겁탈하려는 강간범으로 등장해 성폭행을 시도하다가 니컬러스 케이지의 '정의의 주먹'에 나가떨어졌으며, 그 외에도 다수의 액션 영화에서도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으로 등장하다가, 많은 '정의의 주먹'들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출연작 리스트를 돌아보면, 로베르토 로드리게즈 감독의 영화에 유난히 자주 출연했다는 것.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의 인상적인 악역 연기는 물론이고, <스파이 키드> 시리즈에서도 잠깐이나마 모습을 드러냈으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에서도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등장하는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흥미를 자아내는 점은 배우가 되기 이전의 그의 삶이다.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그는 놀랍게도 1944년에 태어난 60대 노인이다. 로드리게즈 감독의 영화에 한창 많이 출연할 때도 50대의 중년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마약과 무장강도 등의 범죄로 10년이 넘게 교도소를 드나들었다는 그의 이력. 그는 교도소의 갱생 프로그램을 통해 연기를 시작했으며, 라이트급, 웰터급 등의 복싱 타이틀을 가졌다는 점과 함께 배우 에릭 로버츠를 훈련시키는 과정이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눈에 들어 1985년작인 <폭주기관차>에서 본격적인 데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도널드 레이건 전(前) 대통령이 이류 배우로 활동하다가 정치인으로 변신해 대통령이 되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력이다.
그 이후의 대니 트레조는 영화배우라는 직업에 완벽하게 익숙해진 것으로 보인다. 같은 타란티노-로드리게즈 라인에 속했다고 볼 수 있는 스티브 부세미의 연출작이자, 교도소의 적나라한 실상을 다룬 영화인 <애니멀 팩토리>에서 그는 조연 출연은 물론이고, 제작부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교도소를 실제로 경험했던만큼 영화 제작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비록 마스크의 한계(?) 덕분에 주연으로는 등장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영화를 즐기고, 지금의 삶을 즐기며, 어두운 과거를 극복한 그의 모습은 충분히 경의를 표할만 하다.
숀 빈
역량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악역 전문 배우영국의 왕립 드라마 예술 아카데미 출신인 그는 배우로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볼 수 있겠다. 강인해보이는 인상과 날카로운 눈매 덕분인지 그는 악역으로 영화에 자주 출연했는데, 그 눈빛으로부터 시작되는 놀라운 카리스마는 그가 게리 올드만이나 존 말코비치처럼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는 점 자체가 이상해보일 정도로 영화의 긴장감을 더해주는 묘미가 있다.
그의 '악역' 리스트는 대단히 화려하다. 가깝게는 <아일랜드>와 <내셔널 트레져> 등의 최신작으로부터 시작해 마이클 더글러스 주연의 영화 <돈 세이 워드>와 007 시리즈 제17탄 <골든 아이>에서도 악역으로 등장했고, 톰 클랜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해리슨 포드 주연의 <패트리어트 게임>에서도 테러단 보스로 등장해 잭 라이언의 가족들을 몰살하려 한다.
그의 진정한 매력은 다양한 색깔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바탕이 되는 눈빛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퀼리브리엄>에서는 잠깐의 출연이었지만, 파시즘의 땅 '리브리아'의 체제 자체에 대해 고뇌하는 성직자로 등장했으며, <트로이>에서는 '오디세우스'로 등장해 지략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한다. 악역이라는 이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액션 스릴러물에서 자주 출연했던 그의 이력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멜로 영화 <안나 카레리나>에서는 소피 마르소와 비극적인 사랑을 나눈다.
이렇듯 대단한 역량에 비해 다소 주목받지 못하는 면이 있는 숀 빈은 조디 포스터의 최신작인 <플라이트 플랜>에서 웬일인지 악역으로 등장하지 않아 새로운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감춰진 '악역의 화신'인 그가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주목을 받은 영화가 '나름대로' 선인으로 등장한 <반지의 제왕> 시리즈라는 것은 약간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머지 않아 나이 오십을 앞둔 그도 이제는 그 외의 영화에서도 큰 주목을 받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싶다.
스티브 부세미
그만큼 독특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는 본 적이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전형적인 악역 배우는 아니다. 물론 <파고> 등의 영화에서는 나름대로 '건들건들'한 악역으로 등장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악역배우라고 볼 수는 없다. 혹시 눈이 두드러지는 독특한 그의 외모를 주목했다면, <콘 에어>에서 연쇄살인범으로 등장한 그의 연기에 많은 감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서도 '악역'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죄수들의 수송기 탈취 이야기를 영화화한 <콘 에어>는 그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사회에 만연한 다양한 범죄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 영화였다. 범죄자들의 리더로 등장한 존 말코비치도 철학과 법학 학위를 가진 독특한 범죄자였으며, 그의 심복으로 등장하는 빙 라메스나 대니 트레조도 개성있는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스티브 부세미의 연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콘 에어>에서 스티브 부세미는 등장 자체부터 범상치 않았다. 수십명이 넘는 사람들을 변태적으로 살해했던 '갈랜드 그린(얼마나 대단했는지 캐릭터 이름도 잊혀지지 않는다)'을 맡은 그를 중무장한 교도관들이 손발을 꽁꽁 묶고 비행기로 수송하는가 하면, 비행장에서 다른 죄수들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을 때, 혼자 샛길로 빠진 그는 특유의 섬찟한 눈빛을 앞세우며, 어린 소녀에게 다가가 그 소녀를 살해할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의 이런 섬찟한 눈빛은 정의의 화신으로 등장했던 니컬러스 케이지를 비롯해 그 대단하다는 범죄자들조차도 접근하기 무서운 면이 있었다. 이 장면은 내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묘사한다 할지라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 비하면 실감이 나질 않을 것이다.
영화의 핵심을 찌르는 음악인 가 흘러나올 때, 그가 말했던 대사는 스티브 부세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명대사이기도 하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가장 욕심내는 배우로 알려진 스티브 부세미는 그 이후에도 로베르토 로드리게즈 감독의 영화에 조연으로 자주 출연하면서 영화의 양념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숀 빈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에 등장한 그는 이례적으로 선하디 선한 역을 맡아 그를 아는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는데, 한편으로 그는 역량 있는 영화 감독이자, 독립 영화에 많은 애정을 가진 열정적인 영화인이기도 하다.
악역은 현실을 비추는 매개체
우리나라에서 김갑수씨가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때로는 악역이 전형적인 도덕과 상식을 강조하는 선한 이미지의 캐릭터보다 더 많은 연기력과 역량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모 드라마에서 시부모와 가정에 헌신하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 역할을 맡은 연기자가 길거리를 지나치면 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는 에피소드를 생각해보면, 악역에 대한 달라진 시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 파치노가 그동안 늘 비슷한 캐릭터로 등장해 약간의 싫증을 느끼게 함에도 불구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렇다. 알 파치노가 악역으로 등장할 때의 그 위압감이란 알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성격의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 파치노의 그런 연기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화려한 연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악역을 보면, 세상이 보이고, 현실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늘 비슷한 모습의 선한 주인공들과는 달리 악역은 현실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으며, 역할에 따라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영화에 등장하는 악인도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하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어디를 가나 악이 존재하고 있고, 그 존재감만큼 악의 속내를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했던 저 배우들의 '악의 행진', 혹은 '일탈(?)의 행진'이 앞으로도 지속되길 기대한다. 그 외에도 많은 배우들이 '악역'을 통해 진정한 연기 변신을 이루며,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배우 숀 빈./필진네트워크 박형준

영화배우 스티브 부세미./필진네트워크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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