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바람에 날아갈 듯한, 보호해주고 싶은 여자가 그려져서 그걸 벗어나고 싶었어요. 제가 연기하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싶었죠.”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천우희는 처음엔 <어느날>을 찍지 않으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영화는 어딘지 이윤기 감독 색깔과 달라 보이는데다가, 그가 맡은 역할이 원래 대본에선 김남길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등 전형적인 여자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감독님과 이야기하다가 (영화를) 이윤기의 색깔로 풀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내 캐릭터도 다른 식으로 표현해봐야겠다고 갑자기 의욕이 불타올랐고요.”
<써니>에서 ‘본드녀’라 불리던 상미, <카트>의 당찬 미진, <한공주>에서 눈물을 삼키고 눈빛을 벼르던 한공주, <곡성>의 귀신도 사람도 아닌 존재 무명…. 그의 손을 거쳐 간 여자 캐릭터들은 한결같이 강렬한 존재감을 남겼다. 의욕충천한 천우희는 <어느날>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채 혼자서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없이 슬픈 운명의 미소 역을 눈물 없이 밝게 연기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밝기만 한 캐릭터는 본 적이 없다. 아픔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어서 이 캐릭터가 좋았다”는 그는 “다른 영화에선 주로 무슨 속사정이 있는지 궁금했던 캐릭터였다면 이번엔 아무것도 없이 밝은 줄 알았는데 저런 사연을 감추고 있었구나 하는 역할”이라며 예전 캐릭터와의 차이를 설명했다.
그는 웃어도 관객들은 울어야 했다. 미소가 엄마를 만나러 강원도까지 갔는데 외면당하고 돌아오는 장면을 찍으며 그는 “인생 연기”를 했다고 한다. “해가 다 떨어져서 찍을 시간이 부족한 채로 그 감정에 몰입했는데 화면 바깥에서 스태프들까지 모두 울었어요. 촬영이 끝나도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는데 영화 보니까 모두 편집되고 발이 나오더라”며 “인생 연기가 삭제됐다”고 웃었다.
그는 “미소는 늘 애써 난 괜찮아 하는 느낌이고 남을 이해하려는 게 매 컷마다 보인다”고 했다. “작품을 할 때마다 내 주장을 잘 하는 편이지만 굳이 반영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대신 남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다”는 천우희의 원래 성격과 상당히 닮은 듯하다. 다른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대화도 잘 하는 편이지만 한 가지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다. “예뻤으면 좋겠고, 다재다능했으면 좋겠고 점점 강박증처럼 생기는 욕심들이 있긴 해요. 그래도 가장 큰 욕심은 연기 잘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건 버려지지가 않더라고요.”
남은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