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 김고은.’
얼마 전, 배우 김고은이 포털사이트의 인기 검색어로 올랐다. 출연한 드라마 <도깨비>가 종영돼 활동을 쉬고 있는 그가 느닷없이 화제가 된 건 정의당 심상정 상임대표의 대학 시절과 닮은 모습이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지난 3월 9일 방송된 시사 예능 프로그램 <썰전>에서 사회자 김구라가 심상정에게 “김고은이 (심상정 대표의) 얼굴에 있다”고 말했고, 심 대표는 “1초 정도 보인다”고 대답했다. 방송 이후, 사람들은 심상정 대표와 김고은의 얼굴이 재빠르게 교차하는 ‘움짤’(움직이는 사진)을 온라인에서 무수히 퍼 나르기 하며 즐거워했다(엄밀히 따지면 김고은보다 심 대표가 화제가 된 일이긴 하지만).
매 작품 각기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배우들은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주변 사람이든, 동료 배우가 연기한 비슷한 캐릭터든) 누군가를 닮기 마련이다. 재미있게도 김고은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그런 구석이 거의 없다. 김고은의 실제 모습이 반영된 캐릭터 또한 하나 없다. 그녀는 인물을 맡는 순간부터 그 인물이 ‘되는’ 유형의 배우로 손꼽힌다. 충무로에 혜성처럼 등장해 대형 신인 탄생을 알렸던 <은교>(2012, 감독 정지우)의 주인공 은교가 그랬다. “그땐 그냥 은교로 살았다 “는 김고은의 말대로 <은교>는 그녀에게 “수많은 치실이 내 몸 안에 있어서 하나하나 당겨지는 느낌을 준” 소녀였다(<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편집자). 동명의 원작 소설 속에서 활자로만 존재했던 은교가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김고은의 공이 컸다.
다음 작품인 영화 <몬스터>(2014, 감독 황인호)에서 맡았던 복순이는 은교와 채도가 너무나 다른 소녀였다. 복순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잠을 자야 하는, 본능에 충실한 캐릭터다. 김고은은 촬영 전 복순을 치밀하게 분석해 판단을 세운 뒤 복순이 됐다. <몬스터> 촬영이 끝난 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캐릭터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여배우라기보다 동네마다 한명씩 있는, 유별난 여동생 같았다. 이후, <차이나타운>(2014, 감독 한준희)에서 연기한 일영은 냉혹한 악의 세계 차이나타운에서 살아남은 소녀로, 한국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강인한 여성 캐릭터였다. <협녀, 칼의 기억>(2015, 감독 박흥식)에서 맡은 홍이는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일을 겪더라도 앞만 보고 상대를 베러 가는 아이였다. 제주도 구좌읍 평대리에서 로케이션 촬영해 화제가 된 <계춘할망>(2016, 감독 창감독)에서는 계춘(윤여정)의 손녀 혜지를 연기했는데, 클로즈업 숏으로 강조된 제주 해녀 혜지의 순수한 얼굴은 제주도의 평화로운 평대리, 하대리와 잘 어울렸다. 이처럼 매 작품 김고은은 캐릭터를 맡자마자 치열하게 분석한 뒤, 촬영 직전 그 캐릭터로 살았고, 그녀가 연기한 인물은 단단했다.
그 단단함은 그녀의 성장 과정에서 비롯된 것 같다. 김고은은 4살 때 중국으로 건너가 아버지가 틀어주는 한국영화를 보며 모국어를 배웠고, 14살 때 한국으로 돌아온 뒤 혼자 상경해 계원예고에 입학했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들어가 영화과 친구들의 작업에 얼굴을 내밀며 영화 연기에 도전했다. “어렸을 때 중국에서 무용을 억지로 배우면서 내가 해서 기쁜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할 줄 알았다. 이후 학창 시절, 공연하는 내내 날아다니는 기분이었고 끝나니까 슬프더라. 이걸 잡아야겠구나, 생각했다.”(<은교> 개봉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살았던 이력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 가능한 중국어는 그녀를 준비된 중화권 스타로 치켜세우기도 한다. 특히, <계춘할망>은 지난해 하반기 중국 전역 5천여개 스크린에서 개봉해 많은 중국인의 눈물을 훔쳤다(국내 개봉 전에 영화의 리메이크 판권이 중국에 팔리기도 했다).
드라마 <치즈인더트랩>(2016)과 <도깨비>(2017) 또한 중국 관객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배우로서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면, 두 드라마는 김고은을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고은이 개성 강하고, 센 캐릭터만 잘 어울릴 줄 알았는데 로맨스 장르(혹은 연기)도 완벽하게 소화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이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확장한 그녀의 다음 선택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김성훈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