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좋은 날>(1980)
5살 때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로 데뷔해 꾸준히 영화에 출연했던 안성기는 ‘연기가 미래일까’ 등의 고민 끝에 중학교 3학년 때 연기를 그만둔다. 반공 영화, 새마을 영화가 충무로를 주도해 질식할 것처럼 답답했던 1970년대가 지나고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80년, 안성기도 10년의 공백을 깨고 돌아왔다. 유신정권 아래에서 맥이 끊겼던 한국 리얼리즘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 <바람 불어 좋은 날>이 그의 복귀작이자 성인 연기 데뷔작이다. 고도성장기의 억압과 빈곤, 사회상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그려낸 이 작품으로 안성기는 대종상 신인상을 받았다. 이장호 감독은 “당시 조감독이었던 배창호가 적극 추천해 캐스팅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로또”라고 회상했다.
<고래사냥>(1983)
최인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고래사냥>은 신군부에 맞선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 탈출구를 찾던 젊은이들의 심정을 대변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윤락가’에 팔려온 말 못하는 춘자(이미숙)를 고향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병태(김수철)와 왕초(안성기)가 벌이는 소동을 로드무비 형태로 그렸다. 서울에서만 40만명 이상 본 이 작품은 그해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고, 안성기에게 20회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을 안겼다. 배창호 감독은 “대중에게 가장 호소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나에게도 안성기에게도 최고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투캅스>(1993)
<투캅스>는 한국에서 ‘브로맨스의 원조’ 격이자, 경찰 버디무비의 효시로 불린다. 이 작품에서 부패한 비리 경찰 역을 맡은 안성기는 정의감에 불타는 신참 형사 박중훈과 티격태격하면서 완벽한 ‘케미’를 보여줬다. 박중훈과는 <칠수와 만수>에 이어 두 번째로 호흡을 맞췄다. 능글능글하고 코믹한 모습에 사회비판적 요소까지 적절히 녹여내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안성기는 30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최우수연기상을 받았고, 32회 대종상에서는 남우주연상을 박중훈과 공동 수상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겨레> 자료사진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완벽한 변장술로 경찰을 따돌리는 살인사건의 범인과 강력반 형사의 추격전을 그린 이 영화에서 안성기는 인생 최초의 조연이라 할 수 있는 범인 역할을 맡았다. 한석규 등 젊은 배우들의 시대로 접어들었던 90년대 후반, 안성기는 “기어를 바꿀 때”라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악역 같지 않은 악역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해 ‘안성기가 누구인가’를 대중에게 확실히 재각인시켰다. 끈질긴 추격전 끝에 폐광에서 마주친 안성기와 박중훈의 빗속 결투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실미도>(2003)
사회적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던 ‘실미도 684부대’의 실화를 그린 강우석 감독의 작품. 안성기는 냉혹하지만 원칙을 지키는 군인 김재현 준위 역할을 맡았다.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설경구)와 함께 안성기의 명대사 “날 쏘고 가라”는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며 그해의 유행어로 등극했다. 현대사의 그늘을 다뤄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이 영화는 50대 이상 중장년층까지 극장으로 끌어들여, 한국 영화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동원했다. 강우석 감독은 “자신의 촬영을 마치고도 끝까지 촬영장에 남아 후배들과 감독인 나를 지켜줬다. 인간 안성기의 배려와 따뜻함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회상했다.
<라디오 스타>(2006)
한물간 철없는 가수와 매니저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우정과 소통의 의미를 그린 작품. 안성기·박중훈의 4번째 콤비 작품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안성기는 소탈하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보듬는 인간미 넘치는 매니저 역할을 맡아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였다. 박중훈은 “이 영화 속 캐릭터가 선배님의 실제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고 했다. 안성기는 이 영화로 44회 대종상 영화제 남우주연상, 2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27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등을 휩쓸었다.
오는 28일까지 서울 상암동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열리는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영화배우 안성기전’에서 그의 출연작 27편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www.koreafil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