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는 산골 소녀 미자와 슈퍼돼지 옥자의 우정을 그린 영화다. 봉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어려서부터 많이 보고 자랐고 그를 좋아한다”고 밝힌 것처럼 영화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존중을 담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세계관과 궤를 같이하는 듯 보인다. 특히 슈퍼돼지 옥자 품에 눕고 뒹굴며 노는 미자의 모습은 <이웃집 토토로>의 명확한 오마주다. 그래서일까? 마치 실사판 동화 같은 느낌을 주는 <옥자>는 첫 10분 남짓을 보면, 이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그려질 정도로 예측 가능한 서사를 보여준다.
부모를 여의고 강원도 산골에서 할아버지(변희봉)와 살다 4살 때 옥자를 만나 10년 세월 동안 우정을 나눠온 미자(안서현). 옥자는 사실 글로벌 기업인 미란도가 미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개량한 신품종 가축이다. 미란도는 이렇게 탄생한 돼지 26마리를 전 세계 농가에 보내 키우도록 하는데, 옥자도 그중 하나다. 겉모습은 하마와 돼지를 합쳐놓은 듯 거대하고 굼떠 보이지만, 옥자는 미자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고 교감하는 가족 같은 존재다. 어느 날 미란도는 최고의 돼지를 선별하는 콘테스트를 여는데, 옥자는 여기서 가장 우수한 슈퍼돼지로 선발돼 미국 뉴욕으로 가게 된다. 미자는 옥자를 찾아 나서고, 이 여정에 탐욕스러운 미란도 대표 루시(틸다 스윈턴)와 동물학자 조니(제이크 질런홀)를 막으려는 동물보호단체(ALF)가 가세한다. 이들이 서로 쫓고 쫓기며 강원도 산골에서 서울을 거쳐 뉴욕까지 가는 여정이 영화의 큰 줄기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컴퓨터그래픽 캐릭터인 옥자의 정교한 움직임이다. 물에 첨벙첨벙 뛰어들고, 서울 동대문 지하상가를 헤집고 다니는 옥자는 실물인 듯 착각이 들게 할 만큼 완벽하다. 특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망울로 미자를 바라보는 슬픈 눈빛은 대사 한마디 없는 옥자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줄 정도로 현실적이다. 초반 스크린을 수놓는 강원도의 산과 폭포 등 절경 역시 압권이다.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꼭 봐야 할 이유를 꼽는다면 바로 초반 20여분 때문이다.
옥자와 미자가 미란도 그룹 일당의 추격을 피해 동물보호단체와 함께 왁자지껄하게 동대문 지하상가를 누비는 추격전은 시종일관 경쾌하다. 옥자를 해치려는 루시, 조니, 문도(윤제문) 등과 미자·옥자를 돕는 동물보호단체 단원들은 모두 우스꽝스럽고 연극적이며 과장된 모습이다. 이들을 단순히 악하거나 선한 존재로 그리는 대신 풍자의 시선과 특유의 유머를 섞어 묘사해, 의미는 물론 재미까지 놓치지 않으려 한 감독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흩날리는 꽃잎,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패러디한 장면, 한·미를 오가는 탓에 발생하는 통역을 소재로 한 유머 등에선 ‘봉테일’(사소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챙기는 것으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의 별명)식 디테일이 빛을 발한다.
한바탕 난리를 겪고 난 뒤 후반부에 옥자가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부터 영화는 전반부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도축장에 일렬로 늘어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수많은 슈퍼돼지의 모습은 기괴한 동시에 비장미마저 느껴지게 한다. ‘수많은 옥자들’을 미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동물 대량도축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넘어 슬픔까지 샘솟는다.
하지만 <옥자>는 ‘봉준호’라는 이름값에 견주면 다소 아쉽다. 이야기는 평면적이어서 쉽게 예상이 가능하고, 엄청나게 커진 사건은 황당할 정도로 쉽게 해결되면서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을 준다. 동물 대량 도살 시스템과 자본주의의 약탈적 속성을 꼬집는 문제의식 역시 글로벌한 공감은 끌어낼지언정 그리 새롭고 신선한 변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쨌든 확실한 건 강아지나 고양이뿐 아니라 돼지 역시 누군가에게는 반려동물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당분간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조금 께름칙하게 느껴지는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겠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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