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사랑하는 방법 중 으뜸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감독 중 한 명인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남긴 말이다. 몇 해 전부터 난 트뤼포 감독의 당부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재개봉하는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일이 잦다. 지난해 여름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을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영화로 만든 <연인>을 20여 년 만에 다시 보았다.
1920년대 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중국인 남자(양가휘)가 메콩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프랑스 소녀(제인 마치)와 마주친다. 남자는 순수한 눈빛과 성숙한 입술을 지닌 소녀를 보자 첫눈에 반한다. 남자는 승용차에서 내려 소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기숙사까지 태워주겠다며 그녀를 차에 태운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운이 감돈다. 남자는 자석에 이끌리듯 조금씩, 그리고 은밀하게 소녀의 손끝을 매만진다. 이내 팔을 뻗어 소녀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는다.
남자와 소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기기 시작한다. 둘을 둘러싼 감정이 영원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영원할 거라는 믿음으로. 그러나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며 관능의 한계를 넘어선 그들도 현실의 한계는 넘지 못한다. 남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정략결혼을 선택하면서, 불처럼 뜨거웠던 두 사람은 각자의 마음 속에서 얼음처럼 차갑게 서로를 내쫓는다.
소녀가 배를 타고 프랑스로 떠나는 날, 남자는 승용차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떠나보낸다. 소녀는 남자를 향해 품었던 감정에 사랑이 녹아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그러고 보면 ‘떠나보내다’라는 동사만큼 슬픈 단어도 없다. 어느 한철 소중했던 대상을 시간이란 강물에 띄워 다른 곳으로 보내줘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슬픔과 허전함의 농도를 조금 묽게 만드는 것뿐이다.
살면서 우린 온갖 이별을 경험한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작별이든, 사귐을 끊고 흩어지는 헤어짐이든 사람의 힘으로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이별을 겪는다. 이별은 좀체 학습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이별이다. 몇몇 시인과 작가의 말마따나, 이별은 헤어져 영원히 잊히는 게 아니라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 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별’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인연은 쉽게 종결되지 아니한다. 마지막 순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뒷걸음질해야 겨우 멀어질 수 있는 인연이 엄연히 존재한다. 누군가를 향해 줄달음치던 사랑의 감정은 조용히 사라지는 법이 없다. 건물이 붕괴할 때 희뿌연 먼지가 거리를 뒤덮는 것처럼, 사랑이란 세계가 무너지면 낡은 영화 필름이 차르르 돌아가듯 아련한 기억들이 되살아나 뇌리를 스친다. 사랑을 고백하던 어느 봄날 손을 맞잡고 걷던 공원에서 코끝으로 스며든 꽃향기가, 추운 겨울 언덕길에서 함께 손가락을 가리키며 바라본 잿빛 구름이….
<연인>을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소녀와 남자가 메콩강을 사이고 두고 감내해야 했을 그리움이 허공에 번져 있는 것 같았다. 달빛에 자리를 내어주면서 조금씩 사위어가는 태양을 넉 놓고 바라보다가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평생 잊히지 않는 사랑은 첫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기꺼이 티켓을 끊고 사랑 이야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이유는, 사랑이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별이 아프기 때문이 아닐까.’
이기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