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급사 ‘길일’ 잡기 눈치싸움 치열
충무로엔 택일 용한 점집리스트도
요샌 빅데이터 분석·정보력이 중요
충무로엔 택일 용한 점집리스트도
요샌 빅데이터 분석·정보력이 중요
“예전엔 ‘길일’을 택하러 용한 점집을 찾아 헤맸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충무로에 (그런 쪽으로) 유명한 점집 리스트가 돌아다녔다.”
한 영화계 관계자의 이 말을 그저 ‘농담’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과거나 지금이나 영화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개봉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빠진 영화’를 만들었다 해도 개봉일을 잘못 잡으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기 마련.
올해도 영화계 최대 성수기인 겨울시장을 앞두고 ‘개봉일 선택’을 둘러싼 배급사들의 눈치싸움이 치열했다. 애초 <강철비>와 <신과 함께―죄와 벌> 모두 20일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강철비>가 전격적으로 개봉일을 한 주 앞당기며 맞대결을 피했다. 개봉일을 앞당김으로써 초반에 돌풍을 일으켜 <신과 함께>를 누르겠다는 전략이었다.
아직 성패가 모두 가려진 것은 아니지만, 개봉일 조정에 따른 이익은 <신과 함께>에 돌아간 모양새다. <신과 함께>는 개봉 첫날 40만명, 크리스마스를 낀 사흘 연휴 동안 350만에 육박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26일까지 누적 관객 510만명을 돌파했다. 아직 <1987>이 남아 있지만, 이 기세라면 <신과 함께>는 올해 두번째 천만 영화이자 투자배급사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사상 첫 천만 영화로 등극할 것이 확실시된다. 동시개봉했다면 관객들이 <강철비>와 <신과 함께>로 나뉘었을 테지만, <강철비>의 개봉일 변경 덕에 <신과 함께>는 관객들이 양분되지 않는 이득을 누렸다. 롯데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신과 함께>는 본래 여름시장을 겨냥한 텐트폴(주력영화)로 기획됐다가 컴퓨터그래픽 작업이 많아 개봉이 하반기로 미뤄졌는데, 추울 땐 역시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가 제격이라는 판단에 따라 극성수기인 겨울시장에 포진을 시킨 전략이 적중했다. 물론 <강철비>가 개봉일을 옮긴 것도 우리에겐 적지 않은 플러스 요인이었다”고 설명했다.
올해 ‘충무로에서 “신이 내린 택일”이라는 찬사를 받은 또 다른 영화는 <꾼>이다. <꾼>은 수능일에 맞춰 극장에 올릴 예정이었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저스티스리그>(11월15일)를 피해 일주일 뒤인 11월22일로 개봉일을 잡았다. 쇼박스 관계자는 “수능 끝나는 주의 특수를 포기하더라도 수능 2주차를 노리자는 작전이었다.
물론 여기엔 영화계 극성수기인 ‘겨울시장’을 겨냥한 대작들 공세를 피해 11월 틈새시장을 공략하자는 전략이 기본으로 깔렸었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포항 지진의 여파로 수능이 1주일 연기되고, <저스티스리그>가 예상 외로 고전해 다른 맞수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틈새시장을 공략한 <꾼>은 손익분기점(180만명)의 두 배가 넘는 400만명을 동원하며 수능 특수를 고스란히 누릴 수 있었다.
올여름 일주일 차이로 개봉한 기대작 <군함도>(7월26일)와 <택시운전사>(8월2일)도 개봉일이 변수로 작용했다. 먼저 칼을 빼 든 <군함도>는 첫날 스크린 수가 2000개를 넘어서며 ‘스크린 독과점’ 논란에 휩싸였다. 영화계 안팎의 비판이 쏟아지며 200억 프로젝트 <군함도>는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고 660만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반면 <택시운전사>는 <군함도>를 타산지석 삼아 스크린 수를 1440여개로 시작해 최대 1900여개까지로 묶으면서 122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둘의 개봉일이 바뀌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 있다는 얘기가 영화계에 회자됐다.
그렇다면 영화의 운명을 뒤바꿀 만큼 중요한 개봉일을 정하기 위해 배급사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일까? 10년 전과 달라진 점은 과거 점집이 하던 역할을 이젠 데이터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급사들은 최근 3년간 관객 추이, 장르 선호도, 경쟁작 현황, 티켓 예매 상황, 사전 모니터링 시사 등을 꼼꼼히 분석하고 시뮬레이션까지 돌려 개봉일을 선택한다. 특히 수백억원이 투입되는 여름·겨울 텐트폴 영화는 미리 개봉 시점을 점찍어 둔다.
하지만 아무리 개봉일 선정에 과학적 방법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영화의 성패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씨제이이앤엠(CJ E&M) 관계자는 “스포츠 경기는 상대 전력을 분석해 전략을 짤 수 있지만, 영화는 상대의 패를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개봉일을 정해야 하기 때문에 ‘정보력’이 중요하다”며 “개봉 전 편집 모니터링, 마케팅 모니터링 등 일반인 대상 시사를 하는데 여기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귀동냥하고 홍보사·후반 작업 관계사 등의 전언을 통해 경쟁 작품들의 정보를 파악한다”고 전했다. 반대로 자사 모니터링에 참여한 사람들에겐 ‘관련 내용을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받아 정보 누설을 막는다.
김형호 영화시장분석가는 “개봉일이 영화의 성패에 끼치는 영향은 ‘사후 분석’에 해당하기 때문에 다음번 참고사항이 될 뿐”이라며 “요즘엔 촛불·탄핵·세월호·메르스 등 예측 불가능한 정치·사회적 요소의 영향도 커져 개봉일을 정하는 데 고려해야 할 요소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해졌다”고 설명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12월13일 개봉, 현재 누적관객 400만명
12월20일 개봉, 현재 누적관객 500만명
11월15일 개봉, 관객 178만명
11월22일 개봉, 관객 400만명
8월2일 개봉, 관객 1220만명
7월26일 개봉, 관객 660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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