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 바람 바람>을 내놓은 이병헌 감독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에 앞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4월, 제주에서 불어온 ‘바람’은 잔뜩 웃음을 머금고 있다. ‘어른들을 위한 본격 19금 비(B)급 코미디’를 내세운 영화 <바람 바람 바람> 이야기다. 전작 <스물>에서 애어른이 된 스무살 청춘들의 찌질하지만 현실적인 고민을 유쾌하게 담아냈던 이병헌 감독이 이번엔 불륜이라는 흔한 소재를 신선하고 절묘한 감성으로 풀어냈다. 역시나 ‘말맛’을 살린 찰진 대사와 적절한 상황 개그로 무장했다. 나이가 ‘스물’에서 ‘마흔 넘은 중년’으로 껑충 뛰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바람 바람 바람>의 개봉(5일)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이병헌 감독을 만났다.
사실, 코미디는 이병헌 감독의 ‘잘 벼린 장기’다. 독립영화판에서 그의 이름을 알린 <힘내세요 병헌씨>나 각색을 맡았던 <써니>, <과속스캔들>, 첫 상업 장편영화 <스물>은 모두 코미디다. <바람…>은 “고등학교 시절 야설(야한 소설)로 작문 실력을 키웠다더라”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이 감독은 “그저 소싯적 다양한 글쓰기를 좋아했을 뿐(웃음)”이라며 소극적 부인을 했지만.
<바람…>은 은퇴 뒤 제주도에 내려와 살며 ‘바람 삼매경’에 빠진 석근(이성민)과 그의 여동생 미영(송지효), 바른 생활 사나이였지만 뒤늦게 바람의 세계에 입문한 미영의 남편 봉수(신하균), 뇌쇄적 매력을 지닌 제니(이엘) 등 네 남녀가 벌이는 좌충우돌 ‘불륜 이야기’다. 체코 영화 <희망에 빠진 남자들>을 한국 상황에 맞게 각색했다.
소재로만 보면 자칫 자극적으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영화는 철없고 외로운 어른들이 결혼생활에서 맞닥뜨리는 헛된 욕망을 재치있고 담백하게 꼬집는다. 영화 속 봉수의 대사처럼 “더럽지만 신선한” 19금 코미디랄까. “원작보다 수위를 낮췄지만 ‘불륜을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으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어요.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을 어찌 아름답게 포장할까요? 인간에게 내재한 부정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었고, 부질없는 일탈로 쾌감을 느끼는 인물이 왜 깊은 공허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싶었어요.” 소재의 예민함 때문인지 이 감독은 ‘해명’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다소 위험한 소재를, 아슬아슬하지만 과하지 않은 수위로 알맞게 요리해 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감독이 빚어낸 ‘말맛의 위력’이다. 병맛 코드가 짙은 대사의 호흡과 스피드는 연신 예측을 벗어나는 엇박자를 내며 폭소를 유발한다. 겉옷 주머니에서 여자 팬티가 발견되자 “내 꺼야. 입으려고 샀어”라며 턱없는 변명을 둘러대거나 바람피운 사실이 들통나자 여동생에게 “엄마 얼굴 기억나?”라며 동정심 유발 작전을 펴는 석근의 대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명대사를 꼽아보라는 질문에 이 감독은 “말미에 나오는 ‘나는 미영이를 사랑한다. 물론 미워한 적도 있지만 미워한 건 가짜고, 사랑한 게 진짜다. 앞으로 진짜와 가짜를 잘 구분하며 살겠다’는 봉수의 대사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답했다.
활어처럼 살아 펄떡이는 캐릭터도 균형감을 끝까지 잃지 않게 만드는 요소다. 철없지만 미워할 수 없는 형님-매제를 찰떡궁합으로 연기한 이성민과 신하균, 오랜만의 스크린 나들이임에도 편안하게 배역에 스며든 송지효, 자칫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는 바람녀를 감칠맛 나게 연기한 이엘까지 사각 편대의 활약이 눈부시다. “사실 이성민·신하균씨는 장르 불문, 캐릭터 불문이죠. 어떤 배역을 던져도 완벽하게 소화할 배우니까요. 지효씨는 예능으로 쌓은 옆집 누나 같은 익숙함이 좋았어요. 편한 이미지가 미영이 주는 ‘반전’과 만났을 때 시너지가 극대화될 거라 판단했죠. 이엘씨는 생김새와 목소리가 풍기는 신비로움이 좋았고요.”
이 영화를 보는 ‘유부남녀’와 ‘처녀총각’의 공감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결혼이라는 다층적이고 복잡한 경험의 여부가 자아내는 차이일 터다. 감독은 “이 영화의 숙명”이라고 표현했다. “코미디가 어려운 게 대사 하나, 장면 하나만 가지고 웃길 수 없거든요.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도록 유도해 종국엔 배우가 눈만 치켜떠도 웃게 만들어야 해요. 근데, 자신이 모르는 정서면 감정이 안 쌓이는 거죠. 결국 즐기는 사람만 즐기는 영화가 될 거란 걸 처음부터 알았어요.”
대학 졸업 뒤 “잉여생활을 하던 중 술값이라도 벌어볼 건방진 요량”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는 이병헌 감독은 단 두 편의 영화로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세 번째 작품 역시 코미디인 <극한직업>이다. <바람…>이 개봉도 하기 전에 촬영에 들어갔다. “마약반 형사들이 잠복근무를 위해 위장 창업한 치킨집이 일약 맛집에 등극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이에요. 인물 중심인 <바람…>을 찍으며 캐릭터 각각의 감정을 잠시도 놓치면 안 된다는 초조함과 불안함에 몹시 지쳤거든요. 같은 장르라도 <극한직업>은 ‘정통 시추에이션 코미디’에 가까워 다른 결을 느끼실 겁니다.”
목표를 묻는 질문에 “흥행감독으로 불리고 싶다”는 정직한 답을 내놓은 이 감독은 곧 농이었다고 웃으며 “작품에서 너의 ‘인장’이 느껴진다는 평을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쪽이 진짜 목표든 오래지 않아 그리 될 ‘싹’임을 <스물>에 이어 <바람…>이 거듭 증명하지 않을까.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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