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 ‘곽재용’이라는 이름 석 자가 깊게 새겨진 시대가 있었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1989)로 데뷔해 <엽기적인 그녀>(2001), <클래식>(2003),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2004)를 잇달아 내놓으며 ‘멜로 전성시대’를 열었던 곽재용 감독 아닌가. 말갛고 청량한 영상미와 함께 파스텔톤 색을 입힌 판타지 같은 사랑을 그려내는 솜씨가 빛났다. 그에게 ‘멜로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이유다.
오랜만에 곽 감독이 주무기를 꺼내 들고 다시 관객을 찾았다. 5일 개봉한 <바람의 색>을 통해 그는 ‘마술 같은 사랑의 힘’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각자 연인을 떠나보낸 료(후루카와 유키)와 아야(후지이 다케미)가 옛 연인과 똑 닮은 서로를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도플갱어’(분신)와 ‘마술’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풀어낸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마주한 곽 감독은 “소년 시절 감성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지체현상’이 멜로에 천착하는 이유인 듯하다”고 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감독과 저를 많이들 비교하죠. 허 감독은 연애를 많이 해봐서 그런지 늘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를 하는데, 전 판타지 같은 사랑을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와 사진 찍기를 즐겨서 잘 짜인 구도가 빚어내는 미학적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도 꽤 강한 편이죠.”
언제나 그렇듯 <바람의 색>도 빼어난 영상미가 시선을 압도한다. 홋카이도 앞바다를 수놓은 유빙, 기차와 자동차를 타고 나란히 달리며 나누는 료와 아야의 눈빛, 비 오는 날 맨발로 걷는 아야의 사진을 찍는 료의 모습 등은 말 그대로 한 편의 그림 같다. “첫 캐스팅이 홋카이도였다고 표현하곤 해요. 2008년 즈음 유바리영화제 심사위원을 할 때 홋카이도를 거쳐 가며 그곳을 배경으로 꼭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유빙이 떠다니는 하얀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물에 들어가 마술처럼 사라져버리는 한 남자를 떠올렸어요. 그게 시나리오의 시작이었죠.” 여기에 주로 공포나 스릴러의 소재로 쓰였던 도플갱어라는 소재가 덧입혀졌다. “멜로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였단다.
<바람의 색>은 한·일 합작 영화다. 곽 감독은 이미 2008년부터 주로 일본과 중국 등에서 활동했다. <싸이보그 그녀>(2008·일본), <미스 히스테리>(2014·중국), <재세계중심호환애>(2016·중국> 등을 만들었고, <미스 히스테리>는 ‘의미있는 성공’도 거뒀다. “해외 진출한 1세대 감독이네, 도전자네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뭘 잘 몰라서 간 거지 알면 안 갔어요. 하하하. 얼마나 고생했는데. 한·중·일 감성이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제작 환경이 매우 달라요. 일본은 프로듀서의 파워가 세고, 중국은 배우 입김이 너무 세죠. 일본이나 중국에서 영화를 만들면 한국 영화 취급을 받고, 한국에선 또 일본이나 중국 영화 취급을 받으니 힘들죠.”
그러는 사이 한국에서는 차츰 잊힌 존재가 됐다. 2016년, 8년 만에 스릴러물인 <시간이탈자>로 복귀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좋은 기회였는데, 제가 그걸 못 잡았죠. <시간이탈자>가 잘됐으면 한국에서 영화 만드느라 외국엔 시간 없어 못 갔을 텐데. 하하하. 앞으로도 일본과 중국에서 제 영화를 자국 영화로 받아들일 때까지, 끝까지 하려고요.” 차기작도 사이보그와 인간의 사랑을 다룬 중국 에스에프(SF) 멜로물 <-37도>가 될 가능성이 크단다.
그가 해외 활동에 집중하게 된 것은 사실 ‘중견 감독’이 생존하기 힘든 한국 영화계의 환경 탓도 있다. 그와 동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감독 대부분은 이미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로 스러졌다. “한국 영화판은 나이 든 감독을 싫어해요. 유교 사상이 강해 나이 든 사람을 대우해줘야 하니까 제작자 입장에선 말 잘 듣는 젊은 감독을 선호할 수밖에요. 감독 없이도 시스템으로 만들어지는 게 상업영화니 감독 색깔도 요즘엔 별로 중요치 않고….” 대답에서 아쉬움이 짙게 배어 나왔다.
<바람의 색>이 한국 영화계에 오랜만에 불고 있는 ‘멜로 바람’을 이을 수 있을까? “멜로의 침체와 부흥은 정치적 상황과도 연관이 있어요. 2000년대 후반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억눌림을 해소하고픈 욕망, 부패에 대한 반감 등이 쌓여 범죄·사회영화 열풍으로 이어진 거예요. 정권이 바뀌어 죄지은 사람 감옥도 가고 재판도 받으니 이제야 멜로를 볼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거죠.”
곽재용 감독은 관객이 <바람의 색>을 “일본 영화도 한국 영화도 아닌, ‘곽재용 영화’로 봐줬으면 한다”고 했다. “제가 추구했던 것을 많이 담아 스스로는 흡족해요. 아름다운 영상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극장에 편히 앉아 홋카이도 유빙을 볼 수 있으니. 어차피 예매율 1~2위 할 영화도 아닌데, 좀 관대히 봐주세요. 하하하.” 어렵던 시간만큼 다져진 연륜은 그에게 영화적 감수성뿐 아니라 넉살까지 켜켜이 쌓이게 한 듯했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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