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영화를 개봉한 뒤엔 공개적인 인터뷰를 꺼려왔어요. 감독이 영화로만 소통하면 되지 다른 게 뭐가 필요한가 싶어서요. 중국집 주방장이 손님들과 이야기한다고 자장면 맛이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하하하.”
8년 만의 신작 <버닝>을 들고 다섯 번째로 칸국제영화제를 찾았던 이창동 감독(64) 감독은 기자들과의 연이은 인터뷰가 어색한 듯 연신 손을 쥐었다 풀었다 했다. “구식 교육의 세례를 받아서인지 작품 이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번 영화는 다층적이고 모호한 코드가 잔뜩 숨겨져있어 더더구나 설명을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칸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버닝>은 현지 평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면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수상 실패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사실 이 영화에 대한 모든 마케팅이 칸 수상 여부에 집중돼 있었는데,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영화를 같이 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하기도 해요. 한국 영화계 전체적으로 봐도 수상을 했으면 많은 자극과 활력이 됐을 텐데….” 아쉬움이 짙게 베여나오는 솔직한 답변이었다. 이 감독은 무엇보다 칸에서의 엄청난 호평과 국내 평단의 평가 사이의 온도 차이에 놀랐다고 했다. “이 영화는 개성이 강한 영화라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칸에서는 다 좋다고 하는 게 이상했어요. 왜 다 좋다고 하지? 그런데 국내 반응을 보니 호불호가 갈리더라고요. 이 온도 차이의 이유가 저에게는 좀 숙제인 것 같아요.”
<버닝>은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가 어린 시절 동네 친구인 해미(전송서)를 만나고 그에게서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을 소개받으면서 벌어지는 비밀스럽고 강렬한 미스터리를 담은 영화다. 국내 팬들에게서 “어렵다”거나 “모호하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이 영화는 미스터리 영화기는 하지만, 범인이 누굴까를 찾는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벤에 대한 종수의 ‘의심’이죠. 확증은 어디에도 없어요. 영화의 서사라는 것은 결국 욕망의 산물이에요. 관객들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찾아가게 되죠.”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등의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일관된 평가를 받아온 데 대해 감독은 “나에 대한 오해”라고 잘라 말했다. “저는 한 번도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메시지나 답을 찾는 것은 관객의 몫일 뿐이죠. 저는 오히려 질문하고, 관객이 그에 대한 답을 찾거나 질문을 곱씹어 보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요. 할리우드 상업영화처럼 ‘권선징악’ 같은 명징한 메시지를 던지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는 감독으로서의 자신을 “질문을 던지는 자”로 규정했다.
다만, 그는 과거 세대와는 달리 모호한 세상, 답을 찾을 수 없는 세상을 맞닥뜨린 젊은이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제가 젊은 시절에는 답이 분명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였죠. 그것이 계급의 문제든, 정치적 민주화의 문제든. 그런데 요즘은 ‘뭔가 잘못돼 있다’고 느끼지만, 그게 뭔지를 잘 모르는 시대예요. 그에 대한 답은 더더욱 불명확하죠. 예를 들어 탄핵국면과 촛불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는 눈앞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했지만, 청년들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긴 싸움이 필요한데,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 할지를 몰라요. 세상 자체가 미스터리 같은 거죠. 그 막막함에 대해 청년들은 분노를 느끼는 것 아닐까요?” 세상은 더 세련되고 편리하고 여유로워진 듯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그 이면은 정 반대가 아니냐고 했다. 마치 벤의 모습처럼. 지금 어렵지만 점점 잘살게 될 거라는 ‘희망’마저 사라진 현재의 이면을 영화는 종수의 모습을 통해 세밀하게 그려낸 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한 영화에서 ‘헛간’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로 대체된다. 감독은 이 비닐하우스라는 상징물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우디 앨런이 ‘어릴 때 디즈니랜드에 가서 영화를 보다 너무 빠져들어 스크린에 다가가 손을 넣어봤더니 아무것도 없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영화는 그저 스크린에 비치는 빛이에요. 물질성이 없죠.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그런데 소설이나 연극, 미술 등 다른 매체를 접할 때, 해석을 하려 하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는 해석을 하려 들지 않죠. 자기가 느낀 것이 전부고 다른 사람의 느낌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요. 역설적으로 보자면 그만큼 비어있는 거죠. 받아들이기 나름이니까요.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버닝>은 작품의 화제성만큼이나 영화 외적인 논란도 뜨거웠다. 스티븐 연의 욱일기 논란이 대표적이다. 이 감독은 조심스럽게 이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안타깝지만 제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죠. 감독이라고 해서 선생님처럼 말할 수는 없어요. 경험하면서 성숙해가겠죠. 스티븐 연도 굉장히 당황했지만, ‘아, 내가 겪어야 할 일을 겪는구나’라고 받아들이더군요. 우리 영화에 직접적으로 불똥이 튀었지만, 그것 역시 영화의 운명이라면 운명 아닐까요?”
이창동 감독은 지금까지 늘 변화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를 꿈꾼다고 했다. <버닝>도 그 변화의 한 가운데 있다. “전작들과 다르다고들 하는데, 확실히 변했어요. 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번 변화가 좀 더 크게 느껴지셨을 순 있겠네요. 제가 던지는 질문이 좀 더 복잡해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누군가는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낯섦이 새롭게 다가가면서 발전하겠죠. 언제나 성공모델만 따라가다 보면 영화산업 전체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자기 세계를 구축한 ‘거장’은 지금도 새로움과 변화를 말한다. 그가 다음에 내놓을 영화는 또 어떤 방식으로 인간과 삶에 대해 이야기할까? 국내 팬 뿐 아니라 전 세계 팬들의 기대는 <버닝>을 통해 더 높아지고 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