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상반기, ‘지치고 고단하며 갈 길을 잃은 청춘’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영화들이 연이어 개봉하고 있다. 때로는 이 시대 청춘이 처한 현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때로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과 틀에 도전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기성 세대들이 내미는 ‘당의정 위로’ 대신, 또래들의 입을 빌려 “괜찮아, 좀 쉬어 가면 어때?”라는 담담한 메시지를 전하는 점은 이 시대 ‘청춘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 <오목소녀>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제공
■ 오목대회 나간 바둑소녀, 자살 모임 꾸린 청년…고단한 청춘의 자화상 한때 천재 바둑소녀로 승승장구했지만, 패배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그만둔 이바둑. 스물일곱이 되도록 뚜렷한 목표 없이 기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룸메이트가 월셋집 보증금을 날리면서 이바둑은 오직 상금을 위해 오목대회에 참가한다. 만만히 여겼던 첫 대회에서 쓴맛을 본 그는 오목 천재 김안경에게 자극을 받고, 오목 트레이너 쌍삼을 찾아가 특급수련을 받은 끝에 전국대회에 나가게 된다. 웹드라마로 먼저 공개됐다가 최근 개봉한 <오목소녀>는 특유의 만화적 상상력을 무기로 실패를 두려워하는 청춘에게 ‘잘 지는 법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씨지브이아트하우스 제공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성혜의 나라> 역시 전형적인 이 시대 청춘의 자화상을 스케치한다. 성혜는 대기업 인턴 생활 중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가 묵살당하자 회사를 그만둔다. 재취업을 못한 채 새벽엔 신문배달, 낮엔 토익학원, 밤엔 편의점 알바를 하는 그에게 환자인 아버지,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는 무거운 짐이다. 연애도 탈출구는 아니다.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 남자친구는 무능하고 눈치도 없다.
영화 <성혜의 나라>의 한 장면.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버닝>의 종수는 소설가 지망생이지만 유통업체 알바를 한다. 아버지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공무원을 폭행해 재판 중이고, 어머니는 가출했다. 영화는 카드값의 늪에 허덕이는 해미와 “싱크대 옆에 변기가 있는 방에 살았던” 종수를 통해 청춘의 신산한 뒷모습을 비춘다.
앞서 개봉한 <수성못>은 20대를 좀 더 다양하게 묘사한다. 월 80만원짜리 오리배 알바를 하며 ‘인서울’ 대학 편입을 준비 중인 희정, 자신만의 세상에 빠진 히키코모리 희준, 동반 자살 모임을 조직하는 영목까지. <수성못>의 청춘은 멀쩡히 떠 있는 듯 보여도 밑에선 쉴 새 없이 발을 굴러야만 하는 오리배와 같다.
월세 낼 돈이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고, 데이트를 위한 공짜 영화표를 얻기 위해 헌혈을 하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 취업과 연애 모두 실패한 채 시골로 낙향한 <리틀 포레스트> 속 혜원 역시 사회가 정한 ‘룰’에서 보자면 ‘루저’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예전의 청춘영화처럼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고문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 <오목소녀> 이바둑은 결국 전국대회 상금을 타지 못하고, <수성못> 희정은 편입시험에서 낙방한다. <리틀 포레스트> 혜원 역시 취업을 포기하고 귀향한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씨지브이아트하우스 제공
■ “실패하면 어때? 일 안 하면 어때?” 그렇다고 이들 영화는 엔(N)포세대의 절망, 88만원 세대의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도 않는다. 대신 주인공의 입을 빌려 “그래도 괜찮다”며 등을 토닥인다. 두려워하던 패배의 순간 “지면 좀 어떠냐?”고 스스로에게 반문하는 <오목소녀>의 이바둑, 집 대신 위스키와 담배라는 취향을 선택한 뒤 “난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소공녀>의 미소, “다른 사람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는 없지 않냐”며 농사를 짓는 <리틀 포레스트>의 재하는 그런 면에서 닮았다.
<오목소녀> 백승화 감독은 “시간을 낭비하거나 실수 좀 하면 어떠냐. 남들 시선에 나를 맞추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려 했다”고 말했다. <수성못> 유지영 감독도 “치열하게 살아도 실패할 수 있다. 노력하면 된다는 말보다는 좀 게을러도 된다, 늦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제공
세상이 만든 질서에 좀 더 극적인 방법으로 균열을 내는 결말도 있다. 모든 것을 가진 벤이 자신이 욕망하는 단 하나의 존재인 ‘해미’의 실종과 관련됐다는 의심에 무력감과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하는 <버닝>의 종수, 거액의 보험금을 타게 되자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노동하지 않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성혜의 나라> 속 성혜의 선택이 그러하다.
정지욱 평론가는 “기성세대의 꼰대식 충고에 거부감을 느끼는 젊은 세대가 ‘노오력’과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사회에 맞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택하거나, 적극적인 반기를 드는 새로운 영화가 많아지고 있다”며 “작은 영화들에 담긴 이런 시각이 관객의 호응을 얻을수록 주류 영화계의 획일성에도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