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개봉해 267만여명을 동원한 <곤지암> 정범식 감독은 최근 호러 레이블인 ‘언파필름’ 론칭을 준비 중이다. ‘언파’는 정범식 감독이 워낙 냉장고에 파를 얼려놓았다가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부르기 쉬우라고 붙인 이름이라는데 ‘멀지 않은(Un-Far)’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고 한다. 공포로 꽁꽁 얼어붙은 관객들의 모습도 연상시킨다. 원래 3년 전 <기담>을 함께 한 동생 정식 감독과 후배 엄태화·허정 감독 등 4명이 의기투합해 ‘옴니버스 호러 영화’를 해보자며 만들었지만, 한국 공포영화 시장이 얼어붙은 시점인 데다 각자의 사정도 여의치 않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겟아웃>(213만), <애나벨: 인형의 주인>(193만), <컨저링>(226만), <해피데스데이>(138만) 등 할리우드 공포영화가 한국 시장에서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고, 토종 공포영화 <곤지암>에 관객이 환호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정 감독은 “글 쓰는 작가 3명과 비주얼·크리에이티브를 담당하는 작가 1명을 이미 영입했다. ‘정가 형제’(정범식과 정식) 이름을 건 기획을 계속 생산하고, 각 작품에 맞는 감독을 섭외해 작업하는 형태를 고민 중인데, 내년께 언파필름 레이블을 붙인 첫 작품을 내놓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호러영화에도 ‘레이블(상표·브랜드) 시대’가 도래했다. 참신한 기획력만 있다면 저예산으로 세계시장까지 공략할 수 있는 호러장르가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면서 본격적인 ‘상표전쟁’의 막이 오른 셈이다.
지난 3월 개봉한 정범식 감독의 <곤지암>은 관객 267만여명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뒀다. 쇼박스 제공
통계만 봐도 전 세계 호러 시장은 엄청난 확장세다. 북미 지역 영화 통계 누리집인 박스오피스 모조의 집계를 보면, 미국에서 제작한 200억원 미만의 저예산 호러·스릴러 영화의 매출액은 지난 2013~2015년 4천억~7천억원 원대에 머물렀으나, 2016년 처음으로 1조원대를 넘어섰고 지난해에는 1조3700억원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지난해 박스오피스 톱10 중 <사탄의 숭배자>,
(부패한 시체) 등 4편이 호러였는데, 이들 4편이 1070여만명을 동원했다. 타이 역시 <라다랜드>(2011), <피막>(2013), <더 프로미스>(2017), <샴 스퀘어>(2017) 등 공포영화가 잇달아 박스오피스 10위 안에 들며 시장을 키우고 있다. <피막>은 <어벤져스>, <아이언맨3> 등을 제치고 역대 흥행수익 1위(203억여원)를 기록하기도 했다.
할리우드는 일찌감치 ‘호러 레이블’을 통한 시장 선점에 나섰다. 신흥 호러 레이블로 급부상한 ‘블룸하우스’가 대표적이다. 블룸하우스는 <파라노말 액티비티>, <겟아웃>, <인시디어스>, <23아이덴티티>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명성을 쌓았다. 단돈 1만5천달러(1680만원)를 들인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제작비의 130만%에 해당하는 1억9천만 달러(약 2132억원)를 벌어들이며 블룸하우스에 “독창적인 아이디어의 저예산 영화로 대박을 터뜨리는 작지만 강한 스튜디오”라는 찬사를 안겼다. ‘뉴라인시네마’ 역시 블룸하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통 호러 전문 레이블이다. 2000년대 들어 잠시 주춤했던 뉴라인시네마는 <쏘우> 시리즈 등을 통해 ‘공포영화의 장인’으로 자리매김한 제임스 완 감독과 손잡으며 ‘호러 명가’의 명성을 회복했다.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섭다”는 헤드 카피를 내세운 <컨저링>1·2와 스핀오프인 <애나벨>1·2 등 ‘컨저링 유니버스’ 4편을 통해 1조1225억여원의 수입을 창출했다.
유명 스튜디오와 감독도 가세하고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최근 폭스 서치라이트와 전속계약을 맺고 호러·판타지 등을 전문으로 하는 자신의 새 레이블 설립을 선언했다. 호러영화 최강자들의 합종연횡도 눈에 띈다. 제임스 완 감독은 뉴라인시네마와의 작품 연출에 이어 블룸하우스 창립자인 제이슨 블룸과 손잡고 인공지능 로봇을 소재로 한 독특한 호러영화 제작 소식을 알리며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김봉석 평론가(부천 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최근 ‘블룸하우스의 최신 호러’나 ‘제임스 완 사단과 뉴라인이 만난 공포’처럼 레이블을 제목보다 앞세워 홍보하는 경우가 많다. 각 작품을 하나의 브랜드로 묶어내는 레이블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각인시키며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수단이 됐다”고 설명했다.
씨제이이엔엠이 론칭한 호러 레이블 ‘413픽처스’는 <숨바꼭질>을 미국판으로 다시 제작한다.
한국도 잰 발걸음을 시작했다. ‘언파필름’ 외에도 씨제이이엔엠(CJ ENM)이 최근 ‘413 픽처스’라는 이름의 호러 전문 레이블 론칭 소식을 알렸다. 동양의 불길한 숫자 ‘4’와 서양의 불길한 숫자 ‘13’을 합친 ‘413 픽처스’는 국내에서 560만명을 동원한 <숨바꼭질>(2013) 미국판과 한-베트남 합작으로 만든 <하우스 메이드>(2016) 미국판을 통해 북미시장에 도전할 계획이다. 하우스 호러 <미인도>도 10월 타이에서 개봉한다. 씨제이이엔엠 영화콘텐츠 유닛 고경범 해외사업본부장은 “호러는 기본적으로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어 기획력 하나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저비용 고효율 콘텐츠다. 아시아에서 쌓은 네트워킹을 바탕으로 동양의 세계관이 가미된 새로운 호러를 제작하면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라고 밝혔다.
호러 레이블은 또한 넷플릭스·아마존 등 새로운 플랫폼을 바탕으로 다른 장르로의 확장을 꾀할 수 있다. 정범식 감독은 “요즘은 영화가 드라마가 되고 책이 영화가 되고, 게임이 영화가 되는 등 하나의 콘텐츠가 무한 확장성을 가진다. 언파필름 역시 시즌제 드라마 제작 등과 관련해 다양한 플랫폼과의 합작 가능성을 타진 중”이라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