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의 눈 장동건
<태풍>은 상업영화가 주인공을 그릴 때 적용하는 중요한 규칙을 하나 깬다. 아무리 극악한 상황에 놓여있더라도 얼굴이 훼손되서는 안될 것. 훼손이 된다면 단기간에 복원되고 흉터가 남는다면 밴드 크기 정도 이상은 안됨. 열한살 때 부모를 잃고 누나를 떠나 동남아시아에서 거칠게 자란 씬, 장동건의 얼굴 오른쪽에는 이마부터 뺨까지 길게 흘러내린 칼자국과 아래뺨부터 가슴까지 이어지는 깊은 흉터가 있고 왼쪽에는 미간 바로 아래부터 뺨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칼자국이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무모하다 싶을만큼 망가뜨린 얼굴의 장동건(33)이 바다 한가운데 등장한다. 이에 대한 객석의 한결같은 반응은 해는 서쪽에서 진다는 말만큼이나 빤해서 꺼내놓기 민망하다. “그래도 너무 멋있잖아.” 거친 얼굴이 보여주듯 씬은 멀리는 <아나키스트>에서 가까이는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르기까지 21세기에 장동건이 스크린에서 연기한 남성적 캐릭터의 극한에 있는 인물이다. 전작들이, 순수했던 ‘소년’이 가혹한 환경 속에서 ‘남자’로 변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태풍>에서 그 과정은 아역 시절로 요약되고 그는 시종 타버릴 듯 뜨겁다. “<대부>나 <스카페이스>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이 작품 선택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같아요. 일상생활에서 내가 갖고 있지 못한 성격, 또 관객들이 나를 보면서 떠올리지 못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에 대한 재미도 있죠.” 전작들의 연장선에 있다는 부담감, ‘똑같은 것 계속한다’는 평가에 대한 우려가 없었던 건 아니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전에 했던 연기들이 계속 떠올라서 방해가 되기도 했죠. 그런데 없는 걸 보여주기보다는 지금까지 해온 캐릭터의 결정판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연기했어요.” 캐릭터의 굴곡이 많지 않아 ‘센’ 연기는 오히려 쉬웠던 편. 영화 초반 미국 배의 선원들을 몰살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의 신분증을 태워버리는 장면의 연기가 도리어 힘들었고, 고생스러웠던 만큼 개인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웠던 장면으로 꼽는다. “너무 강하고 비극적인 캐릭터만 연기해서 이제 멜로영화의 부드러운 인물은 연기하기가 겁난다”는 살짝 엄살과 함께. <친구>와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어 <태풍>까지 하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그에게는 ‘대작 배우’라는 수식어가 동반된다. “큰 영화에 출연 제안을 받는 것 자체가 뿌듯한 일이죠. 인정받는 것같기도 하고.(웃음) 반면 흥행이라는 건 배우가 가져서는 안될 부담인데 그런 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좀 불편한 일이예요.” <태극기 휘날리며>의 개봉 직전 다가왔던 두려움이 이번에는 그닥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지만 “아직도 시사회에서 내가 나오는 장면을 보면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진다”고 한다. 믿겨지지 않지만 빈 틈 없는 외모와 진중한 답변 사이로 때로 소년처럼 수줍고 때로 아이처럼 무장해제된 웃음을 자주 터뜨리는 그를 보노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설득을 당하고 만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아무리 대작영화라고 하더라도 그처럼 세고, 그만큼 고생스러운 연기를 즐겨하는 건 일종의 자기학대 취미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힘들어야) 뭘 좀 하는 것같잖아요.(웃음)” 간결한 대답이 첸 카이거 감독의 <무극>(2006년 설 개봉 예정)에서 그가 겪었던 ‘그 고생’에 대한 궁금증을 바짝 앞으로 다가오게 한다. 글·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드라마 기대 접으면 블록버스터 기대 한껏 ‘태풍’ 은 어떤영화?
핵 위성유도장치를 싣고 대만을 향해 가던 미국 선박이 해적들에게 공격받는다. 해적 우두머리 씬(장동건)은 20년 전 남한의 거부로 귀순에 실패하고 온 가족이 몰살된 탈북자 출신으로 한반도 전체에 테러를 감행하기 위해 이 유도장치를 탈취했다. 국정원은 씬을 잡기 위해 해군대위 강세종(이정재)을 비밀리에 급파하고 강세종은 씬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자 씬이 오랫동안 찾아헤매던 누나(이미연)를 먼저 찾아내고 곁에서 씬과의 정면대결을 기다린다. 150억원의 순제작비만으로도 이미 한국영화의 기록을 하나 깬 <태풍>은 거대한 스펙터클과 남북 대치상황이라는 ‘흥행형’ 소재, 한류스타 장동건까지 ‘블럭버스터’ 영화의 전제조건을 두루 갖춘 영화다. 광활한 태평양과 타이의 밀림, 이국적인 러시아의 대도시, 그리고 부산 뒷골목까지 두루 훑고 다니는 카메라와 아무리 흠집을 내도 매력이 넘치는 장동건의 거친 표정연기로 시작하는 영화초반 <태풍>은 블럭버스터 영화에 대한 관객의 기대심리를 한껏 고양시킨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태풍>은 드라마의 한계를 자주 드러낸다. 강세종은 씬과 어린 시절 헤어져 암시장의 성매매여성으로 살면서 몸과 정신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씬의 누나를 보면서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되고 이 연민은 씬에 대한 묘한 동질감으로 전이된다. 문제는 두 남자의 감정변화와 우정 아닌 우정이 예측과 추론으로만 이해될 뿐 드라마로 원만하게 펼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냉정과 열정사이라고 할만큼 이글이글 타는 장동건의 눈빛과 차갑고 지적인 이정재의 앙다문 입매는 그 자체로 호연이지만 둘 사이의 교감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데다 인물들의 성격도 복수심과 애국심 등으로 단순하게 읽힌다. 캐릭터가 정교하게 구축되지 않은 탓이다. 한국영화 관객동원 기록을 깼던 <친구>에서 곽경택 감독이 보여줬던 강점은 촌스러운 감정이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디테일들이었는데 비해 <태풍>에는 디테일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나 장치들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15일 개봉. 김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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