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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새영화 ‘브로큰 플라워’ 나도 몰랐던 내 아들…엄마는 누구더라?

등록 2005-12-07 22:26수정 2005-12-08 16:45

나도 몰랐던 내 아들…엄마는 누구였지? 브로큰 플라워
나도 몰랐던 내 아들…엄마는 누구였지? 브로큰 플라워
소파에 붙박이처럼 앉아 텔레비전의 흑백영화를 보면서 남성폐경기를 보내고 있는 듯한 중년남자 돈(빌 머레이). “아내도 없는 당신의 정부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뒤로 하고 떠나는 젊은 애인(줄리 델피)도 그의 무거운 정신과 육체를 소파에서 떼어놓지 못한다. 애인이 떠난 자리에 도착한 한 통의 편지. 익명의 짧은 글은 20년 전 태어난 당신의 아들이 당신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년 동안 몰랐던 자식의 존재, 그렇다면 그 아이를 낳은, 편지를 쓴 여자는 누구인가. 돈은 짐을 싸서 자신을 아빠로 만든 옛 애인을 찾아 길을 떠난다, 라고 하면 꽤 흥미진진한 여정과 꽤 가슴 뭉클한 결말이 대충 그려지겠으나 영화 <브로큰 플라워>는 지루한 일상보다 맹숭맹숭한 여행과 끝내 도착한 황량한 해변에서 주인공들의 썰렁한 웃음 한 토막으로 마무리되는 로드무비 <천국보다 낯선>의 짐 자무시 작품이다. 106분의 상영시간 동안 돈과 돈이 찾아가는 여자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관객은 우물대는 돈의 입과 여자들의 표정 변화만을 주시하며 고요하기 짝이 없는 미스터리 드라마를 따라가게 된다. 여기에 돈의 반대말이라고 할 만한, 에너지 넘치는 돈의 옆집 친구 윈스턴(제프리 라이트)이 넣는 추임새와 나른한 듯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에티오피아 리듬이 동행한다. 로드무비 <브로큰 플라워>를 보는 것은, 엄청난 발견이나 대단한 성취감은 맛볼 수 없지만 길에서 만났던 소소한 풍경과 우연한 대화가 오래도록 복기되는 여행을 다녀오는 것과 비슷하다.

무심한 돈은 익명의 편지도 무심하게 넘기려고 하지만 윈스턴의 부추김으로 여행을 떠나고 20년 전쯤 연애를 했던 다섯 명의 여자를 차례로 찾아간다. 자칭 아마추어 탐정인 윈스턴은 편지가 분홍색임을 착안해 옛 애인들을 찾아갈 때마다 분홍색 꽃다발을 선사해서 그들의 반응을 탐지하고 집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로라(샤론 스톤)는 돈을 환대하고 도라(프랜시스 콘로이)는 당황하며, 카르멘(제시카 랭)은 냉담하고 페니(틸다 스윈튼)는 분노한다. 분홍색 명함이나 타자기, 십대 소년이 끼고 살 만한 농구대 등 유력한 단서는 각자의 집마다 뿔뿔이 흩어져 있다. 단서는 맞을 수도 있고 아님 말고인 그야말로 단서일 뿐이다.

여자들을 만나 “아이가 있나”라는 질문을 넌지시 던져보기도 하지만 돈에게 돌아오는 건 이제는 퇴락한 옛사랑의 그림자이거나 그들의 주름지고 변한 얼굴에 비치는 지나간 세월이다. 그렇다고 흘러간 시간을, 한때의 찬란한 젊음을 탄식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하찮은 대접을 받지만 버려지지 않고 돈의 외투 속에 보관되는 편지이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자괴감에도 불구하고 옛 애인 명단의 다음 이름을 꾸역꾸역 찾아가는 돈의 발걸음이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고 삶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여기 있는 건 현재 뿐”이라고는 돈의 말마따나 그의 여행은 지나간 시간을 되찾는 게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삶을 현재형으로 만들어가는 한 방편일 뿐이다. 영화는 많은 이들이 과거를 떠올리거나 미래를 그리느라 좀처럼 잡히지 않는 현재로서의 시간, 그 미세하게 공명하는 삶의 순간들을 놀랍도록 섬세하게 잡아낸다. 그리하여 영화의 마지막, 자신이 수십 년 간 살아온 동네의 사거리에 멍하니 서 있는 돈의 옆에서 관객은 ‘천국보다 낯선’ 지금 여기, 이 순간을 같이 숨쉬게 된다. 그 느낌은 씁쓸하면서도 달콤하고, 뻘줌하면서도 애잔하다. 영화가 끝나도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 에티오피아 멜로디처럼. 올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8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스폰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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