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곡성>에 출연한 배우 서영희. 스마일이엔티 제공
‘피 칠갑이 어울리는 여배우’. 그는 그런 수식어가 좋다고 했다. <추격자>(2008) 속 연쇄살인의 피해자 ‘미진’과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 속 잔혹한 폭력의 희생자 ‘김복남’의 그림자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따라다니지만 “관객이 배우 서영희를 기억해주는 작품이 두 편이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고 되묻는다. 이번에도 피 칠갑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공포영화 <여곡성>(상영 중)에서 서영희(39)는 가문을 지키려 하는 안방 마님 ‘신씨 부인’ 역할을 맡았다. 영화 개봉을 즈음해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사실, 올해에도 <탐정: 리턴즈>에서는 남편을 구박하는 ‘엄처’ 역할로 유쾌한 모습을 보여드렸어요. 그런데도 관객은 더 임팩트 있는 캐릭터를 기억해주시나 봐요. 자꾸 고생하는 역할만 맡는다고 하시는데, 제 눈이 강아지처럼 처져서 좀 착해 보이는 피해자 이미지인가요? 하하하.”
영화 <여곡성>은 원인 모를 괴이한 죽음이 이어지는 한 고택에 발을 들이게 된 옥분(손나은)과 비밀을 간직한 신씨 부인(서영희)이 집안의 서늘한 공포와 마주하게 되는 내용을 그린다. 지난 1986년 개봉해 한국적 공포물의 대명사가 된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 테두리에 갇힐까 봐 고민하다 너무 궁금해서 원작을 봤어요. 사실 영화 자체도 무섭지만, 당시 배우들의 열정 때문에 배우로서 두렵고 짐스러웠죠. 컴퓨터그래픽을 안 쓰고 배우가 지렁이를 물고 촬영하는 그 열정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어요?” 원작 영화는 이 대감 역을 맡은 배우 김기종이 실제 지렁이를 입에 물고 촬영해 ‘지렁이 국수’라는 한 단어로 한국 공포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 됐다.
<여곡성>에 출연한 배우 서영희. 스마일이엔티 제공
그래도 기술의 발전으로 더 나아진 장면도 있었을 터. 서영희는 “적외선 촬영 장면”을 꼽았다. “조명이 없는 상태에서 적외선 촬영을 한 장면이 무섭지 않던가요? 저도 처음이었거든요. 눈이 안 보이니 후각과 청각이 예민해지더라고요. 눈앞의 옥분을 두고 킁킁 냄새를 맡는 연기가 어떻게 스크린에 구현됐을까 궁금했는데, 제법 괜찮았던 것 같아요.”
한때 ‘호러퀸’이라는 말과 함께 공포영화가 스타 등용문으로 여겨지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이미지 관리 때문에 여배우들이 공포영화 출연을 꺼린다. 유영선 감독은 “피도 많이 나오고 너무 재밌겠다”며 선뜻 캐스팅에 응한 서영희가 의아하고 고마웠다고 했다. “그렇죠. <여고괴담> 시리즈로 대표되던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과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죠. 하지만 전 남들이 기피하는 작품이 더 궁금하고 재밌어요. <김복남…> 때도 그랬거든요. 남들이 안 하는 영화, 잘해야 본전인 영화가 탐이 나요. 사실 공포영화가 처음은 아니에요. <스승의 은혜>(2006)나 <궁녀>(2007)도 호러물이었으니까. 다만, 이번 작품은 그 클래식함에 끌렸어요. 소복 입은 귀신이 나오는 전통 사극 공포영화, 참 오랜만이잖아요?” 이번 영화를 찍으며 공포영화의 폭이 매우 넓다는 것도 알게 됐단다. “감독님이 유에스비에 공포영화 수백편을 담아 참고하라고 주셨어요. 눈물 나는 공포도 있었고, 감동적인 공포도 있더라고요. 관객들도 공포영화가 유치하다는 편견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보시면 좋겠어요. 하하하.”
<여곡성>에 출연한 배우 서영희. 스마일이엔티 제공
촬영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을 물었더니 “40년 만의 강추위가 몰아친 지난 겨울 날씨”란다. “닭 피를 마시는 장면에서 피가 확 뿜어져 나와야 하는데, 겨우 녹여 피가 나오면 바로 얼어버리는 지경이었어요.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는데, 옥분 역을 맡은 손나은의 꽁꽁 언 손이 클로즈업된 장면에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다음엔 밝고 쾌활하고 명랑한 로맨틱 코미디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서영희. “제가 일찍부터 엄마 역할을 하다 보니(웃음) 20대 때 로맨스물을 못 찍었어요. 사랑 이야기는 앞으로도 찍을 수 있겠지만, 20대의 풋풋하고 예쁜 모습이 담긴 로맨스 영화가 없다는 게 조금 아쉽네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바로 이어 찍는 작품도 ‘하드보일드 스릴러’를 내세운 드라마 <트랩>이다. 피 칠갑을 한 가열찬 그의 필모그래피는 앞으로도 계속될 듯하다. 쭈욱~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