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주>의 주연을 맡은 배우 김향기. 씨지브이 아트하우스 제공
한글을 다 못 떼서 엄마가 마치 동화책처럼 읽어주는 시나리오(<마음이>·2006)를 듣고 연기를 시작한 여섯살 꼬마는 이제 스물을 눈앞에 둔 진짜 배우가 됐다. 지난 13년 동안 몸이 훌쩍 자란 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과 사랑도 부쩍 자랐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느꼈던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이 여운으로 남는 작품을 선택하게 되더라”는 나름의 기준을 당당히 밝히는 배우 김향기(18).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마주한 그는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애 첫 원톱 주연’을 맡은 영화 <영주>의 개봉(22일)을 앞둔 데다 이제 막 한양대 연극영화과 수시모집에 합격해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새로운 출발점에 선 셈이다.
“설레죠. 대학생이 된다는 것, 성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우리 사회에서 꽤 크니까요. 우선, 운전면허를 따서 차를 몰고 겨울 바다에 가고 싶어요. 하하하. 소박한가요?” 긴 수험생활의 터널을 통과한 여느 고3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소망을 털어놓던 김향기는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화 <영주>는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고 동생 영인(탕준상)과 힘겹게 살아가던 열아홉 영주(김향기)가 자신의 부모를 죽게 한 사고를 낸 가해자 상문(유재명)과 향숙(김호정) 부부를 찾아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영주가 부대끼게 된 차가운 현실의 모습을 비춤과 동시에 가해자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 복수의 마음이 연민과 용서,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고 애잔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영주>의 주연배우 김향기. 씨지브이 아트하우스 제공
“<신과함께> 촬영하러 지방에 가 있을 때, 숙소에서 처음으로 <영주> 시나리오를 읽었어요. 낯설고 피곤한 공간이었는데도 집중이 너무 잘 됐어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메시지가 훅 다가왔고 오래 남더라고요. 그래서 망설임 없이 선택했어요.”
학교폭력 문제를 다룬 <우아한 거짓말>(2014), 위안부 문제를 다룬 <눈길>(2015)에 이어 <영주> 또한 제법 무게감이 있는 선택이다. “일부러 그런 작품만 선택하는 건 아녜요. 밝은 작품도 하고 즐겁고 재밌는 작품도 하고 싶어요. 영화는 장르도, 기법도, 하루가 다르게 새롭잖아요? 그런 변화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싶어요. 독립영화든, 상업영화든 가리지 않고.”
쌍천만 신화를 달성한 <신과함께> 덕분에 관객 수보단 작품 자체에 집중하는 여유가 생긴 걸까? “<신과함께> 역시 처음부터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 택한 작품이 아니었어요. 모험이었잖아요? 결과가 좋았기에 놀랍고 기뻤던 것뿐이죠. 배우로서는 관객의 기억에 남는 작품을 하는 게 의미 있는 거죠. 기대보다 <영주>의 관객 수가 너무 적으면 좀 슬프겠지만…. 미리 걱정하는 편은 아니에요.”
영화를 찍을 땐 현장에만 집중하는 편이라고 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김향기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현장에서 감독과 스태프들의 진중한 분위기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김향기는 영주로 변해있었다. “촬영 전에는 걱정도 많았어요. 영주가 상문과 향숙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장면이 특히 어렵게 느껴졌어요. 너무나 용기가 필요한 고백이니까. 그런데, 현장에서 슛이 들어갔을 땐 상문과 향숙에 대한 믿음이 고스란히 대사에 배어 나오게 되더라고요. 그게 현장의 힘인 것 같아요.”
영화 ‘영주’의 한 장면. 씨지브이 아트하우스 제공
<영주>는 스스로에게도 선물과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영주를 통해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작지만 진심으로 나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작품이었거든요. 관객들에게도 그런 작품으로 다가가길 바라요.”
모든 아역 출신 배우들이 그렇듯 김향기의 앞에도 성인 연기자로 탈바꿈하기 위해 넘어야 할 높은 벽이 남아 있다. “고민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자연스럽게 그 단계를 넘어가고 싶어요. 저 자신보다 저를 더 잘 아는 분들이 대중 아닐까요? 그분들에게 어색하게 뭔가 새로운 걸 보여주려 하는 건 무리수 같아요. 제게 찾아오는 작품은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작품이 저를 성장하게 만들겠죠.” 대중이 성인 연기자의 관문으로 여기는 로맨스 영화는 어떨까? “글쎄요. 사랑 이야기도 대중이 원한다면 열심히 해 봐야죠. 굳이 지금 당장 일부러 하고 싶은 장르는 아니지만. 하하하.”
김향기가 쌓아가는 필모그래피는 다음번에도 수월치 않다. 내년 개봉할 <증인>에서는 살인사건을 목격한 자폐아 고교생 역할을 맡았다. “자폐아 역할이라 특별히 어렵다고는 생각 안 해요. 어떤 작품이든 새로운 캐릭터는 똑같이 어렵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배운 게 배우로서 쌓은 제일 소중한 경험인 것 같아요.”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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