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활>의 포스터 ⓒ 김기덕 필름
(스포일러 잔뜩입니다. 그리고 이 글은 '상상과 감상의 폭이 넓다'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의 장점을 빌어 느낀 것을 정리한 글입니다. 보시는 분의 주의를 요합니다.)
김기덕, 그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목하는 이유
영화 <활>, 지금에서야 어렵게 감상한 영화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 많은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어쨌든 김기덕 감독은 자신만의 개성을 치열하게 추구하는 감독이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영화를 단관 개봉조차도 포기하려고 했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이면을 꼬집는 또 하나의 현실로 보인다.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늘 정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곳에 있다. 일각에서 꾸준히 전개하는 그에 대한 비판도 여기에 집중되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강간과 매춘 등의, 마초 냄새 물씬 풍겨나오는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를 빼면 뭐가 남느냐는 점, 남성의 병리적인 심리 구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봤을 때 김기덕 감독은 남성 특유의 병리적인 심리 구조를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는 감독이다.하지만 김기덕 감독을 바라보는 개인적인 생각은 다른 편이다. '변신'의 시작인 <사마리아> 이전의 논란의 세 영화인 <섬>, <나쁜 남자>, <해안선>을 돌아보면, 그가 지향하는 곳은 확실히 우리가 바라보기에는 불편한 곳에 있다. 남성들은 가학적인 본능에 시달려 여성을 학대하며, 여성은 때때로 저항과 탈출을 동시에 시도하지만, 결국에는 '순응'한다. 확실히 불편한 구석이 있다. 불편하기로 따진다면 박찬욱 감독 저리가라다.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그의 영화가 또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의 영화가 다르게 보이는 면이 있다. 그 시절, 김기덕 감독이 추구했던 그 불편한 장면들은 오히려 여성을 피학적이고 변태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오히려 남성의 병리적인 심리 구조를 확실하게 지적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가장 많은 논란이 있었던 <나쁜 남자>는 간단히 말해 좋아하는 여자 아이의 머리채를 흔든다던가 짖궂게 놀리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어린 남자 아이들의 행동에서 엿볼 수 있는 남성 특유의 심리 구조를 성인 버전으로 확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남성에게는 그런 본능이 내재돼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면 여성도 불편하지만, 남성 역시 만만치 않게 불편하다. 애써 감추고 제어하는 숨겨진 욕망과 본능을 지적당하는 것같이 불편한 일은 없다. 그의 문제작인 저 세 영화를 보면서 느껴지던 '찔끔'한 개인적인 느낌과 감상은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보인다.게다가 그가 그리는 수많은 남성들을 주목해보면, 이따금씩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잘못된 시선이 엿보인다. 그런 장면들은 여성을 단순히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려는 일부 남성들에 대한 '지적'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사마리아>에서는 그런 남성들이 분노한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자살에 몰린다. 겉으로 봤을 때는 평범해 보이던 그들을 누가 원조교제 범죄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버지의 그런 '행위'에는 잘못된 일탈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그 '무언가'가 될 수도 있겠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그 많은 논란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긍정적으로 보인다. 각본을 직접 쓰는 한계가 곳곳에서 노출되고 있고, 요즘에야 다소 극복한 것으로 보이지만 <악어> 등의 영화에서 어필했던 장면들을 너무 자주 써먹었다는 단점 등이 있기는 해도 어쨌든 우리 영화에서는 한 편의 영화, 그리고 특정 감독을 계기로 이렇게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 적은 별로 없었다.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 모두 영화를 더욱 살찌우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활>을 보며, '첫사랑'의 환상에 빠져드는 인간을 돌아보다
그의 신작인 <활> 역시 마찬가지로 곧장 논쟁의 불길에 휩싸인다. 일부 관객의 지적처럼 김기덕 감독이 '소년과 사랑에 빠지는 할머니의 이야기'도 그렸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어쨌든 김기덕 감독은 깊은 곳에 내재돼 있는 남성의 본능을 또 한가지 파헤치고 있었다. 좋아하는 여성, 내지는 그 여성에 대한 환상을 깊은 곳에 가둔 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남성의 숨겨진 본능, 이것도 모두들 절제하고 제어하면서 살아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일리가 있어보인다. 결국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여성을 남성의 내재된 본능을 위한 '도구'로 그리면서 그 논쟁이 시작된다. 결코 긍정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는 남성의 현실인만큼 무시할 수만은 없는 장면들이다. 긍정의 목소리든, 부정의 목소리든, 이 사회와 남성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계기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활>이 다소 다른 관점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첫사랑'에 대한 환상.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지만, <활>은 '첫사랑'에 대한 그런 판타지를 그린 영화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막바지라는 노년에 접어들어 되새겨보는 '첫사랑'이라는 관점 역시 우리의 복잡다난한 인생의 일면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첫사랑'에 대한 판타지는 그, 혹은 그녀에 대한 좋은 면만 기억했을 때 시작된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먼 훗날 '첫사랑'과 다시 만날 기회를 가졌을 때, 우리가 자주 느끼는 '실망'은 좋은 면만 기억해 자신이 새롭게 창조한 '첫사랑'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산산히 부셔지면서 느껴진다. '첫사랑'도 우리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인 이상, 장단점을 모두 안고 사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첫사랑'에 대한 환상은 다시 발견한 그 '평범함'으로 인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활>의 '소녀(한여름)'는 그림같은 이미지만을 보여주고 있다. 낚시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노인(전성환)'은 주책없이 언젠가는 '소녀'와 결혼할 것이라고 한다. '노인'에게 있어서 '배'라는 공간은 '첫사랑'을 지키기 위한, 세상과는 동떨어진 자신만의 장소다. 이따금씩 몰려오는 낚시꾼들은 한 남자의 삶으로 비춰봤을 때, 소중할 수 밖에 없는 첫사랑의 기억을 무너뜨리려 침범하는 방해꾼들이다. 자신에게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첫사랑'인 그녀를 범하려는 보통의 남성들을 묵인하는 남성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녀도 현실적으로 보면 '평범한 여성'인 이상, 늘 그런 유혹과 위협 속에서 살고 있다. 남성은 첫사랑의 그녀가 그런 유혹과 위협을 받는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노인'에 대한 삶이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노인'으로서는 '첫사랑'에 대한 그런 환상이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가끔씩 낚시꾼들에게 선보이는 '활점'은 '첫사랑'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남아있는 열정을 시험하는 일종의 '테스트'다. 그런 면에서 '보통의 남자들'로 볼 수 있는 낚시꾼들의 요구로 이루어지는 '활점' 역시 '노인'에게는 또다른 유혹이지만, 노인은 결국 그것을 자신에 대한 시험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자칫 잘못하면 '첫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모두 무너지는 결과가 나올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만큼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보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로 인간, 특히 남성에게 숨겨진 본능이다.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건 열정의 산물인 셈이다. 현실을 살고 있는 남성들의 유혹과 도전에 굴할 것인가? 아니면 의지를 살려 그녀에 대한 판타지를 지켜낼 것인가? 노인의 '활점'은 그런 면에서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환상, 그것은 희망일까? 인생의 몽롱한 어느 단면일까?
'노인'과 '소녀',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끝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로 보건데, 그들은 결국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남성과 그들이 품고 있는 '환상'의 대명사다. '대학생'으로만 등장하는 '소년' 역시 마찬가지. '소년'은 보통의 낚시꾼들과는 달랐다. 한번 부딪쳐 본적도 없는 거센 도전이다. 어떤 이유로 이루어진 '접근'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를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려는 낚시꾼들과는 다르게 그는 사뭇 진지하다. '첫사랑의 '환상'은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녀에게 다가온 진지한 사랑에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판타지'를 현실로 나타내고 싶다 하더라도 그 진지한 사랑에 행복을 느끼며, 본인에게는 약간의 시선조차 던지지 않는다면, 현실 이행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니,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이 될 수도 있다.'노인'을 추궁하는 '대학생'은 끝까지 그의 환상을 무너뜨린다. '대학생'이 '노인'에게 내미는 그녀의 미아실종 신고서는 '노인'의 환상을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된다. '소녀'에 대한 노인의 기억은 결국 그녀의 인생의 한 단면일 뿐, 그녀의 인생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리숙해 보였던 '대학생'은 차갑도록 냉정하다. 당연하다. '환상'은 때때로 현실에 대한 도피처이자 의지처가 되기도 하며, 철저할 정도로 냉정한 현실의 관점과 부딪치면, '환상'은 그 근거를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활'은 '첫사랑', 그리고 그 '환상'의 모든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매개체인 셈이다. 그 '환상'을 위해 정성스레 달력에 날짜를 표시하며, 모든 것을 기울여온 '노인'의 생각을 대변하는 대리인이다. '환상'의 영역을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속내로 접근하는 남성들에게는 강한 공격을 퍼부울 수 있는 '팽팽한 무기'로, 또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느껴볼 수 있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김기덕의 언어유희라고 해야 할까? '활'은 화살을 쏘는 무기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의 현악기다. 김기덕 감독은 <사마리아>에 이어 이번에도 다른 의미를 가진 같은 단어를 이용해 인생의 이중성,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환상'의 이중성을 그 속에 담고 있다.인생이라는 것은 의지와 희망으로 만들어지는 한 인간의 역사다. 대체로 의지와 희망이 만들어지는 인생의 목적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때때로 자살의 유혹을 느낀다. 어쩌면 가장 큰 불행이다. '노인'의 최후는 그런 면에서 느껴지는 점이 많다. 비록 최후를 맞이하되, 마지막 소망만큼은 멋지게 재현해본 뒤, 마침표를 찍고 싶은 것이다. 곱게 전통혼례의상을 차려입은 '노인'과 '소녀'는 분명히 어색한 장면이지만, 다름 아닌 최후의 의지와 소망의 반영인만큼 추하다고 매도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노인'은 '소녀'를 직접적으로 범하지 않는다. 최후의 활쏘기 장면이 '소녀'에 대한 노인의 욕망을 반영한 장면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쩌면 현실적인 사랑을 갈구하며, 그것을 이룬 소녀에 대한 반영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소년'과 함께 '배'를 떠나는 '소녀', 흰 속옷을 붉게 물든 '혈흔'을 신비스러운 미소로 바라보는 '소녀', 그련 현실적인 사랑의 갈구는 노인으로 하여금 존재의 의미를 무너뜨리는 장면인 셈이다. '노인'의 자살은 '환상'의 무너짐, 결국 현실의 자각이다. '환상'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거친 파도가 꿈틀거리고, 저마다 다양한 생명들이 살아꿈틀거리는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유유히 떠나는 그녀를 애써 작별하며, '노인'은 거친 현실의 파도로 뛰어든 것이다. 작별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새로운 탄생, 만만치 않은 파도가 기다리는 현실로 뛰어들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서글픔일수도 있지만,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겪게 되는 인생의 한 과정이다. 중년의 나이에 겪게 된다면 새로운 시작, 어린 나이에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성숙이자, 성장이다. 현실로 뛰어든다는 것은 시각에 따라 불행일수도, 또는 행복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인간은 더욱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자신만의 몽롱한 상상만이 절대불변의 가치를 차지하고 있는 '환상' 속에서는 인간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더 다양한 세상을 접할 수 있는 계기는 보장받을 수 없다. 아늑하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그곳, '노인'은,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환상'과 작별하며,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김기덕, 그가 내는 숙제는 늘 반갑다
영화 <활>의 말미에는 '팽팽함에는 강인함과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 죽을 때까지 활처럼 살고 싶다'라는 김기덕 감독의 연출의 변이 보인다. '첫사랑'은 때때로 한없이 따뜻한 달콤함이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설레임과 더불어 그녀에 대한 팽팽한 긴장감이 살아숨쉰다. '첫사랑'에 대한 소중한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인'이 거침없이 활을 들어야 하듯 강인함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내 감상이 김기덕 감독의 연출 의도와는 다른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기억과 감상들이 이 영화에 대한 호감으로 번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영화란 그런 것이기에 그 사실을 믿고 자유롭게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추가로 밝히고 싶다. 그리고 이런 맛이 없다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볼 이유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홍상수 감독과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가지는 최대의 장점은 다름아닌 '상상의 극대화', '넓은 감상의 폭'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어느 '노인'을 계기로 바라본 '첫사랑'에 대한 달콤한 환상,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억의 한 켠에 고이 저장해두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이다. 김기덕 감독 특유의 영상미는 <활> 속에서 그 기억에 대한 황홀함과 적나라한 현실의 반영을 동시에 그리고 있다. 여전히 그 소중한 기억을 곱게 저장하며, '첫사랑'의 달콤함을 계속 맛봐야 할까? 아니면 현실의 파도 속에서 그녀(혹은 그)에 대한 안녕을 빌어야 할까? 이렇듯 <활>은 나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새로운 숙제를 내주고 있다. 이 '숙제'를 통해 김기덕 감독은 여전히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숙제라면 늘 반갑다. 어렵고 거친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길을 걷는 김기덕 감독을 앞으로도 기대하고 싶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노인' 역으로 출연한 연극배우 전성환 씨 ⓒ 김기덕 필름
'노인'과 '소녀',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끝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로 보건데, 그들은 결국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남성과 그들이 품고 있는 '환상'의 대명사다. '대학생'으로만 등장하는 '소년' 역시 마찬가지. '소년'은 보통의 낚시꾼들과는 달랐다. 한번 부딪쳐 본적도 없는 거센 도전이다. 어떤 이유로 이루어진 '접근'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를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려는 낚시꾼들과는 다르게 그는 사뭇 진지하다. '첫사랑의 '환상'은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녀에게 다가온 진지한 사랑에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판타지'를 현실로 나타내고 싶다 하더라도 그 진지한 사랑에 행복을 느끼며, 본인에게는 약간의 시선조차 던지지 않는다면, 현실 이행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니,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이 될 수도 있다.'노인'을 추궁하는 '대학생'은 끝까지 그의 환상을 무너뜨린다. '대학생'이 '노인'에게 내미는 그녀의 미아실종 신고서는 '노인'의 환상을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된다. '소녀'에 대한 노인의 기억은 결국 그녀의 인생의 한 단면일 뿐, 그녀의 인생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리숙해 보였던 '대학생'은 차갑도록 냉정하다. 당연하다. '환상'은 때때로 현실에 대한 도피처이자 의지처가 되기도 하며, 철저할 정도로 냉정한 현실의 관점과 부딪치면, '환상'은 그 근거를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활'은 '첫사랑', 그리고 그 '환상'의 모든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매개체인 셈이다. 그 '환상'을 위해 정성스레 달력에 날짜를 표시하며, 모든 것을 기울여온 '노인'의 생각을 대변하는 대리인이다. '환상'의 영역을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속내로 접근하는 남성들에게는 강한 공격을 퍼부울 수 있는 '팽팽한 무기'로, 또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느껴볼 수 있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김기덕의 언어유희라고 해야 할까? '활'은 화살을 쏘는 무기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의 현악기다. 김기덕 감독은 <사마리아>에 이어 이번에도 다른 의미를 가진 같은 단어를 이용해 인생의 이중성,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환상'의 이중성을 그 속에 담고 있다.인생이라는 것은 의지와 희망으로 만들어지는 한 인간의 역사다. 대체로 의지와 희망이 만들어지는 인생의 목적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때때로 자살의 유혹을 느낀다. 어쩌면 가장 큰 불행이다. '노인'의 최후는 그런 면에서 느껴지는 점이 많다. 비록 최후를 맞이하되, 마지막 소망만큼은 멋지게 재현해본 뒤, 마침표를 찍고 싶은 것이다. 곱게 전통혼례의상을 차려입은 '노인'과 '소녀'는 분명히 어색한 장면이지만, 다름 아닌 최후의 의지와 소망의 반영인만큼 추하다고 매도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노인'은 '소녀'를 직접적으로 범하지 않는다. 최후의 활쏘기 장면이 '소녀'에 대한 노인의 욕망을 반영한 장면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쩌면 현실적인 사랑을 갈구하며, 그것을 이룬 소녀에 대한 반영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소년'과 함께 '배'를 떠나는 '소녀', 흰 속옷을 붉게 물든 '혈흔'을 신비스러운 미소로 바라보는 '소녀', 그련 현실적인 사랑의 갈구는 노인으로 하여금 존재의 의미를 무너뜨리는 장면인 셈이다. '노인'의 자살은 '환상'의 무너짐, 결국 현실의 자각이다. '환상'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거친 파도가 꿈틀거리고, 저마다 다양한 생명들이 살아꿈틀거리는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유유히 떠나는 그녀를 애써 작별하며, '노인'은 거친 현실의 파도로 뛰어든 것이다. 작별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새로운 탄생, 만만치 않은 파도가 기다리는 현실로 뛰어들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서글픔일수도 있지만,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겪게 되는 인생의 한 과정이다. 중년의 나이에 겪게 된다면 새로운 시작, 어린 나이에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성숙이자, 성장이다. 현실로 뛰어든다는 것은 시각에 따라 불행일수도, 또는 행복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인간은 더욱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자신만의 몽롱한 상상만이 절대불변의 가치를 차지하고 있는 '환상' 속에서는 인간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더 다양한 세상을 접할 수 있는 계기는 보장받을 수 없다. 아늑하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그곳, '노인'은,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환상'과 작별하며,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김기덕, 그가 내는 숙제는 늘 반갑다
'소녀' 역으로 출연한 한여름, 김기덕 감독 영화에는 두번째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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