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 하는 유럽 감독의 걸작 두 편이 23일 나란히 단관개봉한다. 유럽의 대표적 여성감독인 샹탈 애커만의 <갇힌 여인>(필름포럼 개봉)과 알랭 레네의 <내 미국 삼촌>(씨네큐브 개봉)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 번득이면서 동시에 각각 서스펜스와 코미디라는 장르적 재미도 충분히 갖춘 영화들이다. 무섭다 인간의 집착 갇힌여자 애커만의 2000년 연출작인 <갇힌 여인>은 사랑하는 여자를 쫓아다니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는 남자를 따라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히치콕의 <현기증>이나 <이창>을 떠올리게 하는 얼개를 지닌 드라마다. 영화는 서스펜스 드라마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사랑이라고 설명되는 감정의 심연에 있는 인간의 광기와 파괴 본성을 정확히 조준한다. 부유한 젊은 남성 시몬(스타니슬라 메하르)은 애인 아리안(실비 테스튀)과 함께 살지만 그의 일과는 외출한 아리안의 뒤를 쫓는 것으로 시작돼 끝이 난다. 아리안이 단짝 앙드레와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는 시몬은 앙드레 뿐 아니라 아리안이 만나는 모든 여자들을 레즈비언으로 의심한다. 영화는 어두운 방 안에서 아리안이 여자친구들과 바닷가에서 즐겁게 노는 모습을 찍은 비디오 장면을 수없이 반복해보며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해”라고 혼잣말하는 시몬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 간결한 장면은 이 사랑이 소통이 아니라 시몬의 ‘단독 행동’임을 알려준다. 그는 아리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서로간에 공평하지 못한 일방적 헌신이라고 생각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그러나 목욕탕이나 차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 등 애커만 특유의 치장 없는 롱테이크 장면들이 보여주는 건 아리안이 시몬의 욕망에 갇힌 포획물이라는 사실이다. 시몬은 점점 더 아리안을 추궁하고, 히스테리를 부리고, 애걸하지만 돌아오는 건 자신이 내지르는 광폭한 열정의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갇힌 여인>은 여인을 가두려고 하면서 자신을 비틀린 욕망 안에 가두는 남자의 파국을 그리지만 서술방식은 가볍고 부드러운 아리안의 목소리처럼 우아하고 고요하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운데 5권 ‘갇힌 여인’을 동시대의 언어로 각색했다.
웃긴다 인간의 야심 내 미국 삼촌
씨네큐브의 개관 5주년 기념작인 알랭 레네의 1980년작 <내 미국 삼촌>은 ‘레네=난해한 작가주의’라는 선입견을 지닌 관객들의 오해를 풀 수 있는 유쾌한 코미디 영화다. ‘내 미국 삼촌’이란 오래 전에 미국을 이민 간 삼촌이 갑자기 나타나 거액의 유산을 물려준다는 유럽인들의 전통적인 농담으로, 이뤄지지 못할 허황한 꿈을 의미한다. 영화 초반은 세 주인공이 자라는 과정을 미니 다큐멘터리처럼 교차해 구성하면서 이들의 성장배경을 보여준다. 부유한 집안에서 인텔리 코스를 밟고 자라 고위직 공무원이 된 쟝(로저 피에르)과,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와 갈등을 겪다가 연극배우가 된 자닌(니콜 가르시아). 혹독한 농부 아버지의 그늘을 박차고 나와 자수성가한 르네(제라르 드 파르디유). 자닌은 영화 중반 유부남인 쟝과 사랑에 빠지고 후반에는 르네와 고용인-피고용인 관계로 엮이면서 세 인물의 연결고리를 만든다. 쟝과 르네, 자닌은 각자의 자리에서 야심을 펼치려고 하지만 그들의 야심은 주변의 작은 변화에도 속절없이 무너진다. 쟝은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르네는 회사로부터 버림받으며 자닌은 쟝의 아내에게 속는다. 레네는 세 주인공이 겪는 사건 사이에 프랑스 동물행동학자 앙리 라보리가 쥐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을 삽입한다. 등장인물들의 싸움 뒤에 쥐들의 싸움이 등장하고 이어 쥐의 탈을 쓴 인물들이 아까 그 싸움을 똑같이 반복하는 패턴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사회화되고 권력투쟁을 벌이고 사랑에 고통받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들이 결국은 쥐들의 본능적인 동물행동과 별 차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란 말짱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다소 극단적이라고 느껴지는 주장이기는 하나, 영화를 보노라면 터져나오는 웃음 속에서 이 주장을 일정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결론에 도달한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필름포럼, 씨네큐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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