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이수진 감독. 씨지브이 아트하우스 제공
‘낯설지만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돋보이는 스릴러.’
<한공주>(2014)로 관객과 평단 모두를 사로잡은 이수진 감독이 5년 만에 들고 온 <우상>(20일 개봉)은 엔딩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가고 극장 안의 불이 켜질 때부터 오히려 관객의 마음을 더 묵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사건의 진실을 좇아가는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곱씹어 보게 하는 메시지의 힘이 있다.
영화는 ‘뺑소니 사건’을 둘러싸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세 사람이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도지사를 꿈꾸는 유력 정치인 구명회(한석규)는 아들이 뺑소니 교통사고를 내면서 궁지에 몰린다. 목숨보다 더 아꼈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아버지 유중식(설경구)은 의문 부호만이 난무하는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고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중식의 며느리 최련화(천우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다. <우상>은 뺑소니 사고를 둘러싸고 국면마다 세 인물이 택하는 ‘선택’에 주목한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한 세 인물의 선택은 사건을 점점 꼬이게 만들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간다.
과연 영화는 관객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인가? 개봉을 앞두고 만난 이수진 감독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상>을 감상하는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본다.
영화 <우상>의 한 장면. 씨지브이 아트하우스 제공
■ 사건보다 인물에 따른 플롯 영화는 ‘뺑소니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려는 자와 이를 은폐하려는 자, 그리고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자의 물고 물리는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우상>은 ‘사건’ 중심으로 플롯을 전개했던 지금까지의 스릴러와는 달리 ‘인물’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세 인물은 각기 다른 동기로 행동한다. 구명회는 정치적 야심, 유중식은 핏줄에 대한 집착, 최련화는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분투한다. 내면에 똬리를 튼 ‘절대적 목적’은 셋 모두를 폭주하게 한다. “무엇을 믿느냐보다 무엇을 믿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대사처럼 <우상>은 이들이 믿는 절대성의 오류를 꿰뚫고 꼬집는다.
이수진 감독은 16년 전 처음 작품을 구상했다. “한국의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보며 그 시작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영화에 특정 사건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내포한 문제들을 담았다. 정치인의 부패, 계급의 문제, 불법체류자의 문제 등등.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변해가는지 짚어보고 싶었다.”
다소 난해하다는 평가와 함꼐 이 감독이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자본이 더 커졌을 뿐이다. 이 작품은 100% 설계도(시나리오)대로 만들어졌다. 이야기의 구조나 구성을 변주하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낯섦을 어려움으로 느끼는 듯하다.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상업영화처럼 직접적이진 않지만, 사유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우상>의 한 장면. 씨지브이 아트하우스 제공
■ 낯설지만 독특한 스릴러의 몰입감 <우상>은 144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할 틈이 없을 만큼 몰입감이 뛰어나다. 각기 다른 가치를 좇는 세 인물의 이야기가 각각의 씨줄날줄로 얽혀들면서 진행되다 어느 순간 맞물린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수많은 궁금증이 밀려오기에 시선을 뗄 수 없다. 감독이 곳곳에 심어둔 은유와 상징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베를린영화제에 다녀온 뒤 영화제용이라는 선입견도 생긴 듯하다. 메타포나 메시지에만 집중할 필요는 없다. 스릴러로 즐겨주시면 좋겠다. 메시지는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장르적 쾌감을 충분히 느끼고 난 뒤 나도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지지하거나 따르진 않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우상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우상에 눈이 멀어 있다. 그리고 반추 없이 그 우상을 쫓다 보면 각 국면에서 최선이라 믿었던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 자체가 우리 사회의 미스터리와 공포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감독의 ‘우상’은 무엇인지 물었다. “단순히 보면 알면서도 못 끊는 술·담배도 우상일 수 있다. 살면서 더 큰 걸 얻기 위해 불의에 눈감아야 할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 나의 우상이 될 수도 있겠다.”
영화 <우상>의 한 장면. 씨지브이 아트하우스 제공
■ ‘연기의 신’인 세 배우의 에너지 다소 불친절한 이 영화에 관객을 붙들어 매는 힘은 한석규·설경구·천우희라는 세 연기파 배우의 조화다. 한석규는 선과 악을 동전의 양면처럼 오가며 권력을 좇는 자의 비겁함과 노련함을 연기한다. 설경구는 애끓는 부성애를 온몸으로 표현하면서도 강약 조절의 미덕을 잃지 않는다. 천우희는 출연 비중이 제일 작지만, 생존을 위해 동물적 감각에 의존해 폭주하는 캐릭터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설경구는 다리를 저는 중식을 자연스레 연기하기 위해 병뚜껑을 신발 속에 넣고 촬영에 임하는 독기를 보여줬다. 천우희는 눈썹을 모두 미는, 여배우로서는 하기 힘든 선택을 했다. 이수진 감독은 세 배우를 한 자리에 모은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했다. “한 선배님은 집 앞 빵집에서 자주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눴다. 감사하게도 역할을 많이 탐내주셨다. 설 선배님도 시나리오를 전달한 지 이틀 만에 ‘심장이 쿵쾅거린다’는 문자로 흔쾌히 합류했다. 련화 역엔 원래 무명 배우를 캐스팅하려 했다. 하지만 몇몇을 만날수록 천우희밖에 없다는 결론이 확고해졌다. 우희는 ‘욕심이 나면서도 두렵다’고 하더니 ‘내가 안 하면 누가 하냐? 대한민국 여배우 그 누구도 안 할 것’이라고 하더라.(웃음)”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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