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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왕의 남자’ 흥겨운 광대놀이 뒤엔 잔인한 현실이

등록 2005-12-21 16:53수정 2005-12-22 14:09

많은 걸 가졌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 신분사회의 정점에 놓여있는 왕과 가장 밑바닥에 깔린 천민, 광대는 끝과 끝에서 걸어와 이처럼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두 신분 사이에는 또한 결코 섞이거나 화합할 수 없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왕과 광대를 ‘투톱’으로 내세운 새 영화 <왕의 남자>는 두 계급 사이의 이러한 아이러니와 그것이 불러오는 파국을 광대놀이의 역동성과 시대극의 우아한 실루엣에 덧입힌 작품이다.

조선시대 남사당패의 광대인 장생(감우성)은 동료인 공길(이준기)을 남창으로 양반들에게 헌납하는 꼭두쇠를 죽이고 공길과 함께 한양에 온다. 둘은 다른 광대들과 손을 잡고 애첩 녹수의 품에서 허우적대는 연산을 풍자하는 놀이판을 벌이다가 의금부로 끌려간다. 왕을 웃기면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장생 일행은 궁으로 들어간다. 연산(정진영)을 웃기는 데 성공하지만 이들이 궁에 머물면서 판을 벌릴 때마다 숙청의 피비린내가 궁을 진동하게 된다.

<왕의 남자>는 흥겨운 광대놀이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신명보다는 조마조마한 긴장감이 뒷덜미를 잡는다. 권태롭고 냉담하기까지한 왕의 얼굴을 앞에 두고 얼어붙은 장생 일행, 결국 왕을 웃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연회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미쳐가는 왕과 코 끝에 다가오는 숙청의 공포를 느끼는 중신들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이 ‘목숨을 건 한판 놀이’의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왕을 웃기면 살려주겠다던 왕의 심복 처선(장항선)의 제안이 왕에게 반하는 신하들을 치려던 연산과 처선의 음모임을 알아차린 장생은 궁을 떠나려고 한다. <왕의 남자>에서 유일하게 의지의 일관성을 잃지 않는 인물은 장생이다. 의지를 잃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유롭다. 궁에서 도망치려다 공길이를 보호하기 위해 돌아와 고문을 당해 눈이 먼 상태에서도 왕에 대한 희롱과 조롱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는 현실을 초월한 자유인의 숭고미마저 느껴진다. 비천한 장생이 숭고해질수록 왕인 연산은 오히려 광폭해지고 구정물에 몸을 던지는 듯한 역할의 전도가 일어난다. 간신들을 치려던 연산의 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변질되고 연산은 공길의 인형극에만 점점 더 몰입하며 스스로 광대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 사이에서 ‘왕의 남자’ 공길은 극도의 불안에 사로잡힌다.

<왕의 남자>는 가장 귀한 것(사람)과 가장 천한 것의 역할 전도를 보여주지만 ‘잃을 것 없는 자유’가 목숨을 담보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현실의 권력 관계를 놓치지 않는다. 폭풍같은 반란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모든 비극이 마무리 된 후 이어지는, 장생 일행이 흥겹게 노는 꿈같은 장면은 자신들만의 소박한 즐거움도 누릴 수 없었던 광대들의 슬픔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장생과 공길을 따라 궁까지 들어갔던 ‘조연’ 광대들인 육갑(유해진), 칠득, 팔복이 보여주는 어리숙한 웃음은 사연도 모르고 역사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조연’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해 어쩔 수 없이 짠한 마음이 든다. 29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영화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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