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03 23:39
수정 : 2019.10.03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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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막을 올린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말도둑들, 시간의 길>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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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세계 최초 월드프리미어 120편 등
열흘간 83개국 303편 역대급 상영
2017년 영화제가 주목·지원해 온
예를란 누르무캄베토프 신인 감독
‘말 도둑들, 시간의 길’로 축제 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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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막을 올린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말도둑들, 시간의 길>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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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가 3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막을 올리고 열흘간의 축제에 들어갔다.
2014년 <다이빙벨> 상영을 두고 불거진 외압 사태 이후 어려움을 겪어온 영화제가 지난해 ‘정상화’를 내세웠다면 올해는 ‘재도약’을 내세웠다. 이에 따라 대대적인 조직·인사·프로그램 개편을 거쳐 이번에 85개국 영화 303편을 상영한다. 세계 최초로 상영하는 월드 프리미어는 장편 97편, 단편 23편 등 120편으로, 역대 최다 수준이다. 내년 25주년을 맞아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글로벌 영화제로 우뚝 서기 위한 발판을 다지는 게 이번 영화제의 목표다.
이날 개막식에 앞서 열린 기자시사회에서 공개된 개막작 <말도둑들, 시간의 길>은 카자흐스탄 출신 예를란 누르무캄베토프 감독과 일본 출신 다케바 리사 감독이 공동 연출한 작품이다. 예를란 누르무캄베토프 감독은 2015년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호두나무>로 뉴커런츠상을 받은 바 있다. 이번에 폐막작으로 선정된 한국영화 <윤희에게>도 이전에 뉴커런츠상을 받은 임대형 감독의 신작이다. 뉴커런츠 출신 감독 작품이 개폐막작으로 동시 선정된 건 처음으로, 그동안 영화제가 신인 감독을 발굴해온 성과라 할 만하다. 예를란 누르무캄베토프 감독은 시사회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뉴커런츠상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됐다. 수상을 계기로 이후 작업에 큰 원동력을 얻었고, 다양한 관점을 가진 많은 관객들에게 제 작품을 보여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말도둑들, 시간의 길>은 또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 선정작이기도 하다. 영화제가 주목한 감독이 영화제의 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을 개막작으로 내세웠다는 건, ‘부산국제영화제’가 그동안 쌓아온 역량과 역사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친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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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막을 올린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말도둑들, 시간의 길>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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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둑들, 시간의 길>은 카자흐스탄의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한 목가적인 영화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대자연을 ‘롱숏’(피사체를 먼 거리에서 넓게 잡는 촬영기법)으로 담아 양쪽 폭이 넓은 와이드스크린에 펼쳐놓는다. 2013년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은 촬영감독 아지즈 잠바키예프가 카메라를 잡아 뛰어난 영상미를 담아냈다. 목가적인 삶의 서정성과 함께 그 이면의 어두움도 영화의 중심축을 이룬다. 강도, 살인, 결투 등의 장르적 요소가 더해지면서 ‘카자흐스탄 버전 서부극’이라 부를 만하다.
초원에서 말을 방목하며 생계를 꾸리는 한 남자가 어느날 말을 팔려고 읍내 장터로 간다. 10살 남짓한 아들과 어린 두 딸, 사랑하는 아내에게 저녁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는 말도둑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남자의 장례식을 치른 뒤 살길이 막막해진 여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때 8년 전 말없이 여자를 떠났던 또다른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여자의 이사를 돕는다. 그 남자는 어딘지 자신을 닮은 듯한 여자의 아들과 말을 타고 어딘가로 갔다가 말도둑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일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두 감독은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인연을 맺어 공동 연출은 물론 공동 제작까지 하게 됐다. 예를란 누르무캄베토프 감독은 “칸에서 다케바 리사 감독에게 준비하고 있는 작품 얘기를 하니 흥미를 보였다. 그가 일본에 돌아간 뒤 스카이프 영상통화로 소통하면서 공동 연출을 논의했다”고 전했다. 다케바 리사 감독은 “카자흐스탄이 옛 소련으로부터 하루아침에 해방돼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이 소년이 갑자기 아버지를 잃어버린 상황과 겹쳐졌다. 그래서 관심을 갖고 연출과 제작을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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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말도둑들, 시간의 길> 기자회견에서 전양준 영화제 집행위원장(왼쪽부터), 배우 사말 예슬랴모바, 예를란 누르무캄베토프 감독, 다케바 리사 감독, 배우 모리야마 미라이가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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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은 지극히 절제된 표정과 움직임, 대사로 인물을 표현한다. 남편을 잃은 여자를 연기한 카자흐스탄 출신 배우 사말 예슬랴모바는 2018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아이카>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남편이 죽은 뒤 찾아오는 남자는 일본 출신 배우 모리야마 미라이가 맡았다. 2004년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그는 이상일 감독의 <분노>,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비전> 등에서 열연했다. 그는 카자흐어 대사를 하며 현지인 연기를 소화했다. 모리야마 미라이는 “사전에 인물에 대한 설정과 해석을 준비했지만, 영화를 보면 그 어떤 정보도 나오지 않는다. 절제된 연기로써 오히려 카자흐스탄의 힘 있으면서도 따뜻한 대지의 기운이 전면에 느껴지는 작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두 감독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초반의 설정이 많이 바뀌었다고 밝혔다. 예를란 누르무캄베토프 감독은 “영화의 열린 듯한 엔딩도 시나리오에는 애초 없던 것이다. 영화를 찍는 도중 받은 영감으로 결말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다케바 리사 감독은 “일본에서는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하는 방식의 작업을 선호하는데, 카자흐스탄에서는 촬영 때마다 수시로 바꿔나가는 걸 보면서 엄청난 유연성에 놀랐다. 이것이 유목민의 경이로움이구나, 느꼈다”고 소감을 전했다.
부산/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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