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 의 장진영
밖에서만 말이 많았다. 제작사가 바뀌었고 제작비도 애초 계획을 뛰어넘어 97억원대에 이른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3년이었다. 촬영을 끝낸 지 벌써 9개월 전. 정작 장진영은 <청연>을 그간 잊고 있었다는 양 여유롭다. “글쎄요, 동요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믿음이 있었죠. (영화 전체 장면 가운데 50퍼센트를 찍은) 중국 로케 현장 분위기가 얼마나 평온했는지 와 본 사람마다 놀라더라고요.” 국내 최초 민간 여비행사 박경원이 꿈에 그리던 제 나라 조선을 향해 몰았던 실제 복엽기 ‘청연’은 1933년 8월7일 이륙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드라마처럼 추락하지만 영화 <청연>은 미국, 일본, 중국 촬영을 거쳐 3년 만에 반도에 드라마처럼 연착륙한다. 윤종찬 감독은 일찌감치 장진영을 박경원으로 못박아뒀다. “멀리 세워두면 남자 같아 보인다는 것까지 이미 다 계산하고, 장면으로 만드셨어요.” 윤 감독의 데뷔작 <소름>(2001년)에 이어 두 번째 만남이다. 윤 감독은 <소름>으로 제 이름 석 자를 충무로에 새기며 영화배우 장진영도 새로 캐냈다. 장진영의 오래고 긴 머리를 자른 장본인이다. “‘커트’머리였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그 다음부터 캐릭터(선영)가 분명해지고 쉬워졌어요.” 그때와 지금, 변한 건 “서로 나이를 더 먹었다”는 사실 뿐이다. 윤 감독은 이번엔 “여자의 힘을 보여주고 싶다”고 장진영에게 요구했다. ‘여자의 힘’은 이 영화의 알짬이자 시대물로서 허구마저 진실해보이는 동력이고 무엇보다 여배우 장진영이 앞장서 이끄는 100억여원 짜리 블록버스터 영화로 매김하는 배경이다. “배역 공부란 게 없었어요. 줄곧 되물은 건 박경원의 꿈이 왜 그리 절실했을까, 모든 고통을 이기게 한 도대체 그 하늘 위를 나는 쾌감이란 게 뭘까였죠.” 배우 장진영의 꿈과 맞닿는 지점이다. 그 기운이 에누리없이 투영된 눈대목이 바로 전일 비행선수권 대회. 최고도에 다다르려고 거듭 기수를 돌리는 박경원, 아니 장진영을 보면서 관객은 뜬금없이 울컥할지 모른다. 사랑, 이별 따위 흔한 감성만 취급했던 한국 영화가 건드리지 못했던 심리적 오르가슴이다. 바로 꿈이 주는 뜨끈한 쾌감인 셈. 한편으론 식민 조선에, 그것도 여성으로 태어난 이의 꿈이 엄연히 갖는 임계치인데, 그 장면을 두고 장진영은 “이겼어도 한계를 예감하고 그래도 계속 꿈을 좇아야하는 운명의 전초전”이라 표현했다. 가장 몰입했고, 만족했다. 친일의, 영웅의, 시대의 경계를 영화는 아스라이 넘나든다. 박경원의 명징한 친일 대목을 역사물로서 부각하진 않지만 가리지 않고, 최고의 비행사가 되기까지의 진부한 수난사를 쿨하게 생략하지 않지만 그것들을 영웅의 것처럼 줄기로 내세우지도 않는다. 언어를 지금의 서울말로 옮기면서 2005년과 맞닿으며 어느 보편적 시대, 자유롭게 꿈을 ‘살다’간 한 여인의 ‘인간극장’을 블록버스터 안에 그저 담으려 했던 것. 장진영이 그 경계에 서있다. 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dud555@hani.co.kr
친일 여류비행사 미화했다? 윤종찬 감독 “개인의 비극적 선택 그렸을 뿐”
지금도 밖에서만 말이 많다. 특히 박경원의 친일 미화 논란이 그렇다. 박경원이 처음 대중화되는 자리라 뭇사람들은 더더욱 시대물의 의무감과 사실성을 치켜세운다. <청연>이 첫 공개시사를 갖기도 전인 19일, 한 인터넷신문이 “제국주의의 치어걸, 누가 미화하는가”란 제목의 기사로 박경원의 친일 행적을 지적하면서 논란은 본격화했다. 박경원이 내선일체를 위해 고려신사까지 함께 참배하며 염문을 뿌렸던 고이즈미 당시 체신장관이 ‘청연’을 선물해줬고, 만주국을 승인·기념하는 일만친선 비행이 추락한 마지막 비행의 실체라는 점 등을 내세웠다. 적극적인 친일이 없이 마지막 비행 자체가 불가능했단 요지다. 이에 21일 <청연> 시사 뒤 기자감담회에서 윤 감독은 “박경원을 미화하려고 한 게 아니다”며 “면죄부를 줄 생각은 더욱 없었다”고 밝혔다. 경원의 영화 속 궤적은 이렇다. #장면 1=지혁과 가장 행복한 비행을 하던 경원,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선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있잖아요. 비행기만 잘 타면. 남자고 여자고 조선인, 일본인…. 다 소용없어요.” #장면 2=비행대회에서 어렵게 승리한 경원, 꿈을 이야기한다. “장거리 비행에 도전하고 싶어요, 일단 고국방문 비행부터.” #장면 3=경원은 일만친선 비행에 참가할지 말지 숱하게 고민한다. 자신의 사랑과 목숨 또한 경원의 꿈을 위해 봉납한 지혁은 말한다. “조선이 너한테 해준 것도 없잖아.” 영화는 상상과 실제가 반반씩 뒤섞였다. 같은 조선 비행사인 이정희, 강세기가 실재하고 지혁은 가짜다. 지혁과의 사랑도, 한일 갈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조선적색단 항일 사건도 모두 허구다. 그러나 특정 장면이 논란의 대상이 되진 않는다. 다만 이런 흐름을 두고 국가에 대한 배신이라는 측면을 눈여겨 보느냐, 꿈을 이루기 위한 개인적 선택이라는 면을 눈여겨 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후자에 주목했던 감독은 그래서 굳이 일만 비행에 앞서 일장기를 들고 어둡게 미소짓는 경원을 가리지 않는다. 이건 실제다. 24일 제작사 코리아픽쳐스는 “근거 없는 소문들이 영화와 상관 없는 소모적인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며 고이즈미와의 염문설, 일본계 영화 자금 유입설 등을 부인하며 윤 감독의 말을 거듭 강조했다. 21일 기자간담회에서 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박경원은 양날의 칼을 손에 쥔 것처럼 꿈을 향해 노력할수록, 조국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영화를 통해 그러한 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을 그리고 싶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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