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빅 화이트>의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되는 궁지에 몰린 이들 중 일부에게 '보험 사기'란 참기 힘든 유혹일 수도 있다. 한치의 증거도 남기지 않고 일을 꾸밀 수만 있다면, 거액의 보험금은 그야말로 넝쿨째로 넘어온 호박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언론의 사회면에서 이따금씩 볼 수 있는 '보험 사기'는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한 이들이 주로 일으키는 범죄다. 추리 소설에서조차도 완전 범죄란 불가능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만 알고 있다면 이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이고, 기나긴 착각 속에서 구렁텅이에 빠질수도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끊임없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어보인다.
설정이 비슷하다고 <파고>를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대히트작인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성공 이후로 '다웃파이어 할머니'의 이미지 속에서 대개 비슷한 풍의 코미디 영화에 주로 출연해왔던 로빈 윌리엄스는 <인썸니아>를 통해 연기 변신에 성공함으로써, 악역 연기를 포함해 다양한 색깔의 연기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12월29일에 개봉하는 <빅 화이트>로 연결된다. <빅 화이트>에서 그가 맡은 '폴 바넬' 역은 겉으로 보면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물론이고, <인썸니아>와도 다른 분위기의 캐릭터다.'폴 바넬'은 정말 손을 쓰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궁지에 빠져 있다. '뚜렛증후군'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아내의 치료비로 인해 자금 사정이 안좋아져 오죽하면 사무실의 전기까지 끊길 지경에 몰린 것이다. 그런 고민 속에 빠져 있을 무렵, 어느날 갑자기 그의 심장을 뒤흔든 한 구의 정체불명의 시체. 이 시체가 구원의 오랏줄이라면 하늘은 그에게 정말 너무도 냉혹한 오랏줄을 준 셈이다. '폴 바넬'은 궁지에 몰린 이들 중 '일부'가 택하는 좋지 않은 수단을 택하기로 결심한다. 바로 보험 사기다. 이 범죄를 잘만 재구성한다면 100만 달러의 보험금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결국 그 시체를 실종된 동생의 시체로 위장해 경찰에 신고한다.끝없이 펼쳐지는 알래스카의 설원과 보험 사기, 영화 <빅 화이트>의 2가지 특징은 코엔 형제의 전설적인 명작 <파고>를 연상시킨다. <빅 화이트>도 <파고>처럼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여러가지 설정을 통해 얽히고 섥히게 만들면서 영화를 진행하지만, <빅 화이트>에게 <파고>를 기대한다면 실망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빅 화이트>는 무게있는 소재에 비해 가벼운 분위기의 코믹으로 흐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파고>에 비하면 몰입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이 떨어지는 몰입도는 멜로, 코미디, 스릴러 등의 다양한 요소를 한 작품에 모두 담으려는 과욕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구조도 몰입을 방해하는데에 상당한 역활을 한다.
'뚜렛증후군'에 걸린 홀리 헌터, 그녀의 연기를 주목하라
사기극을 주제로 한 영화는 어떤 분위기로 연출되든 스릴러 장르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허술한 이야기 구조는 <빅 화이트>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릴러 영화의 생명은 당연히 치밀한 이야기 구조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이례적인 코믹 사기극 <매치스틱 맨>을 본 관객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코믹한 분위기로 연출되더라도 스릴러 장르에서 치밀한 이야기가 빠지면, 그 영화의 김은 이미 팍팍 샌거나 다름없다. 로빈 윌리엄스를 캐스팅했다는 사실에서 이 영화의 방향을 코믹으로 잡았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다고 코믹강박관념에 빠질 필요까지는 없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인썸니아>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선보였던 인상적인 악역 연기를 믿고, 조금 더 심각한 분위기로 영화를 이끌었다면 그 매력은 사뭇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고 그런 이야기 진행에 비해 주목할만한 점이 있다면 등장하는 배우들을 들 수 있겠다. 로빈 윌리엄스와 홀리 헌터, 그리고 우디 헤럴슨과 지오반니 리비시 등, 다양한 세대의 연기파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영화의 캐릭터들은 등장하는 배우들의 힘을 업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편이다. 로빈 윌리엄스는 궁지에 몰려 해서는 안될 범죄를 저지르는 소심한 가장으로, 지오반니 리비시는 어서 다시 도시로 돌아가길 바라며 건수를 올리느라 여념이 없는 보험회사 사원으로, 그리고 우디 헤럴슨은 과거에 출연했던 영화들과는 또다른 분위기의 거칠 것 없는 떠돌이로 등장한다. 특히 우디 헤럴슨은 짧은 출연이지만, 외모부터 만만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덕분에 알듯 모를듯한 웃음을 줄 수 있을 듯하다.물론 <빅 화이트>의 진정한 히어로는 뚜렛증후군에 시달리는 '폴 바넬'의 아내로 등장하는 '홀리 헌터'다. <피아노>를 기억하는 마니아라면 그녀의 연기에서 더 많은 놀라움을 느낄 것이다. 그녀의 연기를 이야기하자면, 극중에서 그녀가 걸린 병인 '뚜렛증후군'을 어느 정도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뇌 이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정되는 '뚜렛증후군'은 '틱증'이라는 질병과 함께 찾아오는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에 의해 그것이 특성으로 굳어져 버리는 신경 장애의 일종이라고 한다. 가장 흔한 사례는 지나치게 잦은 눈 깜빡임이 그 예라고 하는데, 명확한 원인도 없는만큼 치료법도 완성되지 않아 그 고통은 더욱 크다고 한다. 올해 나이로 만 47세가 된 홀리 헌터는 잦은 눈 깜빡임과 함께 묘하게 귀엽게 들리는 쉴새없는 욕설을 잊지 않는 연기를 선보인다. 거기에 의상까지도 아동복과 비슷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 귀여움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빅 화이트>의 재미의 절반 이상은 그녀의 그런 노력어린 연기에서 비롯된다. 심지어는 영화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코믹에 집중하면서 그녀의 연기가 코믹 장르 속의 웃음을 위한 일종의 도구가 된 것이 대단히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다. 영화의 분위기를 조금 더 무겁게 처리해 그녀의 연기를 더욱 부각시켰더라면, 일반인들이 흔히 정신 질환으로 오인하기 쉬운 '뚜렛증후군'에 대해 확실하게 인식시킬 수 있었다는 생각에 더 큰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뜬금없이 그리워지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너무나도 강한 개성의 배우들, 그로부터 비롯되는 개성 강한 이 캐릭터들은 결국 <빅 화이트>의 양날의 검이 된다. 이 영화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는 마크 미로드 감독이 캐릭터에만 의존하지 않은 채 더 자신감있게 영화를 연출했다면, 배우와 캐릭터의 개성은 양날의 검이 아닌 확실한 진검이 됐을 것이다. 지나치게 나서도 안되지만, 너무 소극적이어도 안되는 직업이 바로 영화감독이다. 이 사이의 기준을 잘 잡을 수 있는 감독, 그리고 배우에게 의존하기보다 배우를 살리면서도 이용할 줄 아는 감독이야말로 진정한 명감독이다.끝없이 이어지는 설원 속에서 잔잔한 영화를 원하는 관객이라면, 그럭저럭 가볍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겠지만, 쟁쟁한 출연진의 면면에서 스릴러 요소를 원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 로빈 윌리엄스를 다시 <인썸니아> 속의 '핀치'처럼 냉혹한 살인범으로 변신시킬 수 있는 감독은 정말 크리스토퍼 놀란 뿐인걸까? <빅 화이트>를 보면서 뜬금없이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리워진다. 크리스토퍼 놀란이야말로 배우의 재능을 남김없이 이용하며 영화와 배우를 한꺼번에 살리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 구의 시체, 그에게는 선물이 될까? 독이 될까? ⓒ CJ엔터테인먼트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홀리 헌터, 그녀가 이 영화를 살린다. ⓒ CJ엔터테인먼트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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