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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필진] 일본 B급 영화의 기인 스즈키 세이준

등록 2006-01-09 15:09수정 2006-01-09 15:13

스즈키 세이준의 진정한 문제작 <살인의 낙인> ⓒ 닛카츠 영화사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스즈키 세이준의 진정한 문제작 <살인의 낙인> ⓒ 닛카츠 영화사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스즈키 세이준과 <살인의 낙인>, 특유의 솔직담백함과 기괴함

일본에서 'B무비'의 바람이 일어난 시기도 미국처럼 1950년대 말이라고 한다.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거장'이라고 말하는 감독들은 미국 영화계처럼 스튜디오 시스템에 익숙해있던 감독들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로저 코먼이 독자적인 영화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며 B무비의 탄생을 열었다면, 일본에서는 <감각의 제국>으로 유명한 오기마 나기사 감독과 스즈키 세이준 감독이 B무비의 시작을 열었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거장들과는 상당히 다른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제한된 제작 조건 아래에서 무명 배우들을 기용하며, 어딘가 엉성해보이면서도 독창적인 연출을 즐겼던 감독이다.

그들 중에서 스즈키 세이준 감독은 '기인'으로 봐도 좋을 정도로 거침없는 연출과 그에 걸맞는 재치있는 발언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리고 한창 활동이 왕성했을 시기에는 1년에 6편이 넘는 영화를 연출했을 정도로 다작을 즐겼던 감독이다. 자신의 영화 연출 기준을 철저하게 '재미'로 밝히는 그는 얼마 전에 초청된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로패를 수상하며, 특유의 재치있는 발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베니스 영화제의 초청작인 <피스톨 오페라>에서 여성 킬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남성 캐릭터로는 더이상 뭘 말해야 할지 힘들었다"고 밝혔으며, 연극적인 무대 설정에 관해서는 "그냥 갑자기 생각났지 뭘"이라는 답변을, 여러 색깔의 음악이 다양하게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관객이 지루해하면 곤란하잖아"라는 너무나도 솔직한(?) 답변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한다.

그의 영화는 실제로 그의 발언만큼이나 거침없는 연출로 유명하다. 정해진 각본과 설정을 끄떡하면 자주 뜯어고쳐 스탭들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이한 인물들의 출현과 당시의 기준으로는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관객을 정신없게 만드는 설정으로 가득했던 <살인의 낙인>은 그로 하여금 '해고'라는 시련을 겪게 만든다. 스즈키 세이준은 당시 일본의 영화인들이 '스즈키 세이준 사건 공동투쟁 위원회'를 만들어 기나긴 법정 소송을 거친 끝에 니카츠 영화사로부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문제작 <살인의 낙인>은 확실히 '문제작'이었다. 넘버3 킬러가 넘버1이 된다는 식의 간단한 이야기 구조는 왠지 총격 액션 영화를 연상시키는 설정이지만, 액션과 총격전보다는 넘버1이 되가는 과정에서 넘버3가 겪는 정신적인 혼란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여배우들의 노출 수위도 그렇지만, 흑백 화면 속의 등장 인물들은 보통의 세상과는 동떨어진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익힌 밥의 냄새를 맡으면 흥분 상태에 이르는 주인공의 모습은 당시 관객들을 경악시키기 충분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조악한 판타지 장면과 공간을 극단적으로 활용하는 촬영기법이 되겠는데, 특히 주인공 '하나다'가 세면대의 배수관을 이용해 타겟을 살해한다는 설정은 짐 자무시 감독이 영화 <고스트 독>에서 그대로 차용하면서 더욱 유명해진 장면이다.

물론 짐 자무시 뿐만 아니라 우위썬(오우삼)이나 쿠엔틴 타란티노 등, 대개 비슷한 장르와 형식을 통해 정상의 위치에 오른 감독들이 <살인의 낙인>에서 얻은 영감은 상당하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시련을 겪었던 그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로패를 받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영화감독과 마니아들이 그의 영화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 증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여성 킬러가 되어 돌아온 넘버3, 또다시 넘버1에 도전하다

ⓒ 쇼치쿠 필름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 쇼치쿠 필름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피스톨 오페라>는 스즈키 세이준이 무려 10년만에 연출한 작품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살인의 낙인>의 리메이크작으로서, 주인공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경한 영화다. 그런만큼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액션보다는 넘버3가 넘버1으로 등극하는 과정 자체를 묘사하고 있으며, 주인공의 기괴한 심리 변화를 영상으로 표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 영화는 스즈키 세이준의 마니아가 아니라면 지켜보는 자체가 고역일 정도로 정상인과는 동떨어진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 이야기를 꼬고, 또 꼬고 있다. 영화를 다 본 이후에 생각을 정리하자면,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가 복잡하다. 관객과 소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그렇듯 대단히 복잡한 이야기보다는 상당한 자극을 줄 것으로 보이는 전체적인 색감과 연극을 연상시키는 무대 설정이다. 흑백 영화라는 한계 속에서 제작된 <살인의 낙인>에서 미처 풀어보지 못한 감독의 색채 감각을 모두 풀어헤친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특히 피를 상징하는 것인지 붉은 장미가 쉴새없이 등장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색감과 매개체들은 상당한 부분에서 키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렇듯 <피스톨 오페라>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테크닉이 총망라돼 있는 영화로 보인다. 아무래도 스즈키 세이준 감독이 <살인의 낙인>에서 미처 풀어보지 못한 소원과 한을 이 영화를 통해서 모두 풀어보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주목한 점이 있다면 이 영화는 우리 영화 <친절한 금자씨>와 비슷하다고 생각됐다는 것이다.

치밀한 이야기 전개가 돋보였던 일본 만화 <올드보이>를 영화화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 <올드보이>와는 정반대의 연출을 지향한다. <친절한 금자씨>는 이야기의 세밀한 전개보다는 이야기의 영상화에 주목하고 있으며, 캐릭터와 도구, 장면 등을 모두 이미지로 꾸미고 있다. 주인공인 '금자(이영애)'에게는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이미지가 느껴지며, 기괴해보이는 영상과 캐릭터들에게는 1980년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을 느낄 수 있었다.

묵직하면서도 세밀한 이야기 전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피스톨 오페라>는 물론이고, <친절한 금자씨>도, 이명세 감독의 <형사>도 무척이나 마음에 안드는 작품이었지만, 그렇듯 현란한 색감과 이미지의 차용에 주목하는 관객이라면 그 평가가 다를수도 있다고 본다. 특히 앞서 언급했지만, <피스톨 오페라>는 록과 일본의 전통 음악이 뒤섞인 다양한 음악의 매력을 느낄 수 있으며, 당시 나이 36세를 무색하게 하는 에스미 마키코의 수려한 외모 역시 시선이 당겨진다.

냉소로 잠재 본능을 파괴하는 그만의 대담함

내 생각에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구성'이 아니라 '파괴'다. 사물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파괴하는 힘이다. -스즈키 세이준-

(영화 제작이 가지는 개인적인 의미를 질문하자) 당신은 왜 기자를 하나? (일이 좋아서라고 대답하자) 맙소사,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난 내가 왜 이런 바보 같은 일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려면 100일 가까운 나날 동안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원돼 함께 죽도록 고생해야 한다.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 스즈키 세이준이-

스즈키 세이준은 인간의 모든 노력이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한 사람이라도 이 어리석음을 수긍한다면, 그것은 더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무상함을 유머로 표현하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의 영화 안에서 유머는 카타르시스를 대치한다. -사토 타다오(일본의 영화평론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찾아온 스즈키 세이준  ⓒ PIFF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부산국제영화제에 찾아온 스즈키 세이준 ⓒ PIFF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파괴과 허무, 그리고 냉소, 스즈키 세이준의 가치관들이 모두 드러나는 짧은 어록들이다. 그가 생각하는 'B무비', 혹은 영화 자체에 대한 가치관을 느낄 수 있는 말들이기도 하다. 원래 냉소란 사람들이 지극히 불편해하는 분위기 중 하나다.

<살인의 낙인>을 지켜보며 경악한 당시의 관객들은, 어쩌면 캐릭터들을 정신 이상으로 보일 정도로 기괴하기 그리길 좋아하는 그의 내면에 숨어있는 냉소를 불편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국판 냉소의 상징인 올리버 스톤도 연출하는 영화마다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기억해본다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스즈키 세이준이 영화를 통해 그리길 좋아했던 야쿠자와 킬러 등의 캐릭터는 명예욕과 같은 인간의 관념적인 욕구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문신일대> 등의 영화를 지켜본 마니아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스즈키 세이준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을 자극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그런 허망한 관념적 욕구에 대한 잠재 본능이 아닐까? 언제 어디서건 잠재된 본능을 공격당하는 것 같이 민망하고, 기분나쁜 순간은 없다.

그동안의 스즈키 세이준의 인터뷰 발언들을 지켜보면, 대단히 무성의해보이면서도 허탈하게 하는 발언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무성의와 허탈함 속에 감춰진 인간의 허례허식에 대한 공격은 예전과 다름없이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넘버3가 넘버1이 되는 순간, 오히려 본인이 다른 넘버3들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어제도 오늘도, 많은 넘버3들은 그렇게 넘버1이 됐다가 내리막의 계단을 걸었다. 넘버1이 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넘버1이 됐으며, 넘버1으로서 어떤 마무리를 보여줬는지가 더 중요하다. 스즈키 세이준은 넘버3가 넘버1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처절한 과정과 더불어 그런 허망한 내리막길을 동시에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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