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남매의 여름밤>(20일 개봉)은 이사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빠 병기(양흥주)는 남매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를 자신의 작은 상용차 다마스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한다. 도착한 곳은 할아버지(김상동) 혼자 사는 오래된 2층 양옥집. 병기 가족은 이곳에서 여름 방학을 보낼 작정이다. 할아버지는 과묵하고 쇠약하다. 서먹해 하던 남매는 점차 할아버지와 집에 정을 붙인다. 옥주는 2층에 자기 방이 생긴 걸 내심 반긴다. 잠자리에 친 모기장 안으로 동생도 못 들어오게 한다.
여기에 고모 미정(박현영)이 합세한다. 처음엔 잠깐 들르는 듯하더니 얼마 뒤 아예 짐을 싸 들고 왔다. 미정의 남편이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통에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음을 가족들이 알아챈다. 미정은 “이혼하겠다”고 하고, 오빠 병기는 “나 보면 알잖아”라며 말린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병기가 이혼했으며, 사업 실패 뒤 ‘짝퉁’ 운동화를 팔고 용달 일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리고 있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각자 상처와 흠결을 지니고도 이들 가족은 평온하게 살아간다. 둘러앉아 콩국수와 비빔국수를 먹고, 할아버지의 조촐한 생일상에서 웃음꽃을 피운다. 어린 남매는 살갑게 지내다가도 동생이 누나가 싫어하는 걸 무릅쓰고 엄마를 만나고 온 걸 두고 투닥거리며 싸운다. 어른 남매(병기·미정)는 집 앞 슈퍼 평상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서운했던 속내를 털어내고,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는 문제를 상의한다. 이처럼 영화는 이렇다 할 사건 없이 누구나 겪을 법한 가족의 일상을 차분하고 담백하게 담아낸다.
이 영화로 장편 데뷔를 한 윤단비 감독은 첫 장편은 가족 이야기여야 한다고 일찌감치 정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 가족 이야기로 정평 난 일본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에서 위로받은데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가 가족에 관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시나리오를 썼을 땐 작은 <기생충> 같은 블랙코미디에 가까웠지만, 이것이 정말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인지, 장편을 만들기 위해 관습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됐다”고 전했다. 결국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소소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로 바꿨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사건의 진폭은 크지 않아도 감정의 진폭은 결코 작지 않다. 옥주는 사소한 일들에 실망과 좌절,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한 뼘씩 성장해간다. 그리고 영화 막판에 가장 큰 사건을 겪으며 감정의 깊은 골을 건넌다. 윤 감독은 “우리 가족뿐 아니라 모든 가족에겐 흠결과 상처가 있고 각각의 방식으로 치유해나간다는 걸 알게 됐다”며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옥주 또한 아픈 시간을 딛고 잘 성장할 거라는 믿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아련하고 따스한 정서가 배어나는 데는 주요 배경인 구옥이 큰 역할을 한다. 윤 감독은 두 달 넘게 걸려 인천 미추홀구에서 제격인 집을 찾아냈다. 실제 그곳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출가시킨 노부부가 사는 집으로, 세월의 흔적이 묻은 집기와 소품을 거의 그대로 영화에 활용했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이 만든 노래 ‘미련’을 임아영·장현·김추자가 부른 세 버전을 각기 다른 장면에 삽입해 인물의 감정과 정서에 공명하게 한 대목도 눈에 띈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평단에선 <우리들> 윤가은 감독과 <벌새> 김보라 감독 뒤를 잇는 걸출한 신인이 나왔다는 등 호평 일색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올해 들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시민평론가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올해 초 네덜란드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밝은미래상을 받았다. 또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미국 내슈빌, 스위스 취리히 등 여러 국외 영화제에서도 공식 초청이 잇따르고 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