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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팔리는 그림 그려야 한다면 ‘화가’ 아닌 ‘기인’으로 남겠어요”

등록 2021-07-20 23:16수정 2021-07-21 10:18

[짬] 서울 개인전 연 진의장 전 통영시장

“어느 선배 화가님은 걱정을 합니다. ‘진의장은 화가가 아니라 기인(奇人)이다. 그림이 팔리려면 화가가 되어야 한다’,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될 것이 아니라 한국의 서양화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님은 외손주인 원보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눈에는 산만하고 무질서하게 보이느냐, 내 눈에는 모두 정돈되고 한곳으로 나아가고 있음이 보인다’.”

북한산 둘레길의 길목인 서울 평창동 언덕배기에 자리한 문화공간 ‘운심석면’에서 지난달 20일부터 이달말까지 8년만에 두번째 서울 나들이 전시를 하고 있는 진의장(76) 전 통영시장은 20일 자필로 쓴 작가노트를 보여주며 스스로를 ‘기인’이라 소개했다.

운심석면(雲心石面·구름의 마음 돌의 얼굴이란 뜻)은 미술애호가이자 수집가로 이름난 김용원(86) 삶과꿈 대표와 가족들이 자택에 지은 전시장으로, 지난해 종로구와 맺은 ‘자문밖 아트밸리 프로젝트’ 기증 협약에 따라 구립미술관 변신을 앞두고 있다. 건립 3년 만에 처음 대중에게 문을 열어 화제인 이 특별한 공간에서 첫번째 기획 초대전의 주인공으로 그가 낙점된 연유가 이채롭다.

8년 만에 두번째 서울에서 초대전
평창동 ‘운심석면’ 첫 대중 공개전

고 박경리 선생과 인연도 그림으로
2008년 시장 시절 ‘통영 귀향’ 주선
어릴적부터 혼자 그려온 ‘자유 화풍’
“예술도시 통영의 꿈은 여전히 생생”

2004년 11월 진의장(오른쪽) 통영시장의 설득으로 5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찾아온 박경리(왼쪽) 선생이 통영 시민문화회관에서 강연을 할 때 모습이다. 진의장 작가 제공
2004년 11월 진의장(오른쪽) 통영시장의 설득으로 5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찾아온 박경리(왼쪽) 선생이 통영 시민문화회관에서 강연을 할 때 모습이다. 진의장 작가 제공

지난 23일 오랜 술친구 황석영(가운데) 작가가 진의장(맨 오른쪽) 작가의 전시장을 축하 방문한 뒤 운심석면의 김용원(맨왼쪽) 대표와 함께했다. 진의장 작가 제공
지난 23일 오랜 술친구 황석영(가운데) 작가가 진의장(맨 오른쪽) 작가의 전시장을 축하 방문한 뒤 운심석면의 김용원(맨왼쪽) 대표와 함께했다. 진의장 작가 제공
“고 박경리 선생에 대한 평전을 준비하고 있는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이 자료 수집과 채록을 위해 찾아왔다가 내 작품을 봤는데, 그 뒤 운심석면의 김 대표에게 추천을 했더라고요. 훗날 만나고보니, 김 대표가 서울법대 10년 선배시더군요.”

사실 그와 박경리 선생의 특별한 인연은 지난 2008년 선생의 별세를 계기로 널리 알려졌다. 1950년대 후반 떠난 이래 통영을 찾지 않았던 박 선생은 그무렵 마침 통영시장이던 그의 설득으로 50여년 만에 다시 찾았고, 끝내 그리던 고향 남쪽 바다가 보이는 미륵도에 묻혔다.

“황석영 작가와 더불어 오랜 술친구인 화가 여운(2013년 작고)이 어느날 찾아와 대뜸 통영 그림 한점만 달라고 했어요. 원주에 계시는 박 선생께서 통영 바다를 보고 싶어한다면서요. 그래서 내가 태어나서 자란 세병관 일대를 비롯해서 좋아하던 통영의 곳곳을 지도처럼 스케치 해놓은 작은 액자를 건네줬죠. 그뒤 1987년께 하동 세무서장으로 근무할 때 선생께서 찾아오셔서 처음 만났어요. <토지>의 배경이어서 당연히 자주 와보신 줄 알았는데, 그때가 처음이셨어요. 내 그림이 마음에 들어 작가를 보고 싶어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그렇게 시작된 만남으로, 박 선생은 2005년 1월5일 그를 원주로 불러 ‘통영에 묻히겠다’며 ‘재봉틀은 나의 생활이요, 국어사전은 나의 문학이요, 소목장은 나의 예술이니 보관해달라’는 유언을 미리 남겼고, 2008년 폐암 투병 중 돌연한 뇌출혈로 쓰러진 박 선생의 마지막 순간도 지켰다.

그는 통영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선생의 이름으로 국제음악제를 열기까지 비화 등등 그림과 얽힌 다양한 인생의 인연을 담은 수필집 <바다의 땅 멈추지 않는 나의 꿈>을 2014년 펴내기도 했다. 통영문인협회 회원으로, 시도 발표하고 즐겨 낭송하는 그는 부산문화방송(MBC)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시낭송 프로그램을 진행 한 적도 있다.

“인문학적 소양은 예술의 깊이를 더해주지요. 이런 의미에서 시와 음악과 그림이 함께하고 있는 것은 서로 풍성한 예술로 승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는 서울법대를 나와 1971년 행시를 거쳐 고위 세무공무원으로 봉직했고 경남 통영시장(2003~2010년)을 지낸 정치인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그런가 하면 대학시절 재미로 수천년 동안 내려온 수학 난제 하나를 풀어놓은 그림이 훗날 한 대학교수의 눈에 띄어 수학계에 보고되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그가 발표한 ‘존재와 가능의 수학적 명상'이라는 수학 논문도 비치해놓았다. 경상대에선 명예 경제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베토벤 음악을 들으면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진의장 작가가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Pathetique)’(왼쪽)과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오른쪽)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베토벤 음악을 들으면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진의장 작가가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Pathetique)’(왼쪽)과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오른쪽)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이번 초대전의 표제작인 ‘찬란한 봄’을 설명하고 있는 진의장 작가. 사진 김경애 기자
이번 초대전의 표제작인 ‘찬란한 봄’을 설명하고 있는 진의장 작가. 사진 김경애 기자
이번 초대전에 낸 30여 점 가운데 가장 대작인 수묵화 ‘기·율·음’(660×200cm). 사진 김경애 기자
이번 초대전에 낸 30여 점 가운데 가장 대작인 수묵화 ‘기·율·음’(660×200cm). 사진 김경애 기자
“5살 때부터 혼자 그림을 그렸고 공직 생활 하면서도 한번도 붓을 놓은 적은 없으니 평생 본업은 화가라고 해야죠. 하지만 딱히 배운 적은 없으니 스승도 없죠. 동양화-서양화 계보도 없이 자유롭게 마음 가는대로 그려왔어요. 굳이 따진다면, 내 그림의 원천은 ‘아름다운’ 통영이고, 스승은 베토벤이라고나 할까요? 작곡가들이 그림을 보며 악상을 떠올리듯 나는 음악을 들으면 이미지가 펼쳐지곤 해요.”

실제로 그는 1970년부터 개인전을 최근까지 꾸준히 해왔고 프랑스 살롱전, 아시아 현대미술전 등에도 출품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시장 시절 그는 윤이상국제음악당 건립, 동피랑 벽화마을 조성, 연대도 에코아일랜드 프로젝트, 미륵도 케이블카 설치 등을 추진해 ‘예술도시 통영’을 만들고자 애썼다. 지난 2018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의 고배를 들기도 한 그는 “아직 마무리짓지 못한 예술도시의 꿈”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평생 지켜봐준 애호가들의 주선으로 중국과 뉴욕 전시 계획도 추진하고 있어서 수백호짜리 대작을 준비중이라고 귀띔했다.

‘작가 노트’에서 팔리는 그림을 그리라는 선배의 조언에 대한 그의 답은 마지막 문장에 있었다. “어떤 틀을 만들고 스스로 그 틀에 갇혀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면, 나는 그림을 포기하고 차라리 술이나 마시겠습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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