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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3시간짜리 ‘낯선’ 무대로의 초대…‘로드 킬 인 더 씨어터’

등록 2021-11-04 18:38수정 2021-11-05 02:30

기존 서사 해체한 ‘메타연극’…명동예술극장서 14일까지
<로드킬 인 더 씨어터>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로드킬 인 더 씨어터>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은 극호와 극불호로 나뉜다.” 지난달 31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로드킬 인 더 씨어터>가 막을 내린 뒤에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구자혜 연출은 이렇게 말했다.

극과 극의 평가로 갈리는 건 연극의 ‘낯섦’ 때문이다. 연극 특유의 스토리와 서사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장장 3시간의 이 공연은 낯설기 그지없다. 속으로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되뇌며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반면 그 낯섦이 좋거나 연출자 의도를 파악한 사람에게 이 연극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배우들 대사가 뭘 의미하는지, 연극이 말하는 게 뭔지를 곱씹으며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명동예술극장은 전통적인 서사를 보여주는 연극이 많이 오르는 무대다. 그러나 구 연출은 연극적인 서사를 전복하고 해체해버린다. 연극 내용이 연극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른바 ‘메타연극’ 방식이다. 이 때문에 호불호가 더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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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인 더 씨어터>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로드킬…>엔 길을 떠나다가 자동차에 치인 고라니, 우주선에 태워진 러시아의 떠돌이 개, 서울올림픽 개막식 성화 불에 타 죽은 비둘기 등 죽음에 내몰린 동물이 나온다. 11명의 배우는 30여개 배역을 소화한다. 때로는 동물을, 때로는 사람을 연기하며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연극은 사람 때문에 생명을 잃은 슬픈 동물 이야기를 보여주며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뻔한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불편한 진실을 불친절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서사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대사가 있지만 맥락이 없어 보인다. 배우들은 독특한 어조로 끊어 읽거나 고함치듯 말을 내뱉는다.

연출자의 의도는 뭘까? 구 연출은 지난 1일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4~5년 동안 매년 세월호를 소재로 연극을 만들었다. 사회적 참사의 피해 당사자들이 느끼는 고통을, 당사자도 아닌 우리가 연극적인 장치를 써서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지를 매번 고민했다. 이런 고민 끝에 기존에 만들었던 방식을 완전히 전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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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인 더 씨어터>의 구자혜 연출. 국립극단 제공

그는 “이 연극을 ‘출연’이 아니라 ‘출현’으로 봐달라”고 했다. 출연이 전통적인 연극 제작 방식이라면, 출현은 새로운 방식이다. 배우가 무대에서 고통을 느끼는 척하면서 연기(출연)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무대에서 고통을 현실 그대로 나타나도록(출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연출 스타일은 관객이 쉽게 연극에 빠져들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연극과 거리를 두게 한다. 하지만 이런 연출은 극에 몰입해 한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는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연극이 끝난 뒤 현실로 돌아와서도 문제를 계속 생각해보게 만든다. 무대에 등장해 끝나는 ‘출연’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 나타나는 ‘출현’이 되게 하는 것이다.

<로드킬…>의 또 다른 특징은, 누구나 평등하게 함께 누리는 연극의 가치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공연에 앞서 한 배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소개한다. 무대에 갑자기 등장하는 강한 빛과 소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직접 보여주고 들려준다. 구 연출은 “연극에 들어가는 강한 조명과 음향, 암전을 원치 않는 장애인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연출자로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자세히 소개하면 연출 일부분을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연극을 보는 동안 안전하게 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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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인 더 씨어터> 포스터. 국립극단 제공

모든 공연에 배리어프리(농인·시각장애인이 쉽게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것)를 적용했다. 그 하나가 수어통역인데, 보통 방송에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수어통역사 2명이 배우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연극에 맞춰 표정 연기까지 한다. 수어통역이 마치 공연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또 하나는 음성 해설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무대 모습, 배우 동작 등 시각정보를 설명한다. 마지막은 한글 자막이다. 무대 위 엘이디(LED) 패널에 한글 자막이 계속 올라온다.

앞서 구 연출은 성소수자를 톺아본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로 지난 5월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을 받았다. 그는 시상식에서 “어떤 사람의 삶을 감히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나중에’라는 합리화로 혐오와 차별을 방관하는 정권이 부끄러워했으면 한다”는 수상 소감으로 화제를 모았다.

지난달 22일 막을 올린 <로드킬…>은 오는 14일까지 공연된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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