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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나이트에서 날리던 ‘트로트’ 꽃미남

등록 2006-02-15 17:42수정 2006-04-11 16:26

최병걸과 정소녀의 듀엣 <그 사람>이 수록된 음반.
최병걸과 정소녀의 듀엣 <그 사람>이 수록된 음반.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39) 최병걸과 조경수
최병걸도, 조경수도 이제는 그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조경수의 이름은 그의 아들의 이름 때문에 회자되고 있는 것 같다. 다름 아니라 영화계의 스타로 자리잡은 조승우가 바로 조경수의 아들이다. 그건 그렇고 최병걸과 조경수가 스타 가수로 등극했던 시점은 1977~8년께다. 요즘의 화두인 ‘트로트 고고’와 연관된 시대다. 최병걸은 ‘진정 난 몰랐었네’로, 조경수는 ‘아니야’로 ‘그룹 사운드 출신이 트로트를 부른다’는 현상을 개별적 외도가 아니라 집단적 흐름으로 만들었던 주역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까 부끄러워 할 것도 없지만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경력이 이들을 스타로 만들고 대중의 기억에 남겼다.

그런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닐 텐데 특별히 이 두 사람을 한데 모아서 기억을 더듬어 보는 이유는? 그건 다름 아니라 이 두 명이 ‘정성조와 메신저스’라는 그룹에서 노래하고 연주한 경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최병걸은 ‘리드 보컬’로 활동했고, 조경수는 베이스 주자이자 ‘세컨 보컬’로 활동했다. 정성조와 메신저스(그 전에는 정성조 콰르텟)는 1970년대 중반 젊은이들이 몰려들던 명동의 오비스 캐빈과 로열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날리던 존재였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증언이다. 이들의 인기의 비결은 기본적으로 음악 때문이었지만, 두 보컬리스트를 포함하여 멤버들이 유달리 미남이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들의 연주를 생생히 보여주는 음원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라이브 업소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간간이, 가수들의 음반과 영화 사운드트랙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온전한 형태의 음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김민기의 음반(1971)과 양희은 2집(1972), 한대수 1집(1974) 같은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에서의 연주가 정성조 악단의 것이라곤 해도 그게 진면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물 좀 주소’에서 붕붕 나르는 베이스의 연주가 조경수의 것이라는 사실은 마치 퍼즐 맞추기 게임처럼 흥미롭지만….

<징기스칸>이 수록된 조경수의 음반.
<징기스칸>이 수록된 조경수의 음반.
‘정성조와 메신저스’의 연주를 가급적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음원 자료는 독집 앨범보다는 영화 사운드트랙인 <영자의 전성시대>(1975)와 <어제 내린 비>(1978) 등이고, 몇몇 곡에서는 최병걸과 조경수의 보컬도 들을 수 있다. 정성조의 영화음악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더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웬걸? 여기에 실린 음악은 최병걸과 조경수의 ‘뽕짝 히트곡’과는 거리가 멀다. 이건 굳이 사운드트랙 음반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최병걸은 1971년부터 살롱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1972년 안혜경과 함께 포크 혼성 듀엣인 찹스틱(뒤에 ‘늘 둘이’로 개명)을 결성하여 몇 개의 음원을 남긴 것이 있다. 1977년 정상급의 미녀 탤런트 정소녀(본명 정애정)과 함께 듀엣으로 자신의 자작곡인 ‘그 사람’이라는 곡을 부를 때만 해도 그가 트로트를 부를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요는 최병걸은 ‘당대 최고의 팝 보컬리스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잊힌 인물이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가 암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요절한 셈인데, 요절 가수 이야기가 나오면 김현식, 김광석, 유재하는 쉽게 떠올려도 최병걸의 이름은 잘 나오지 않는다. 왜일까? 주관적 기억을 떠올려서 유감이지만, 나의 기억으로는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나온 최병걸이 ‘내가 이런 거나 불러야 되나’라는 표정으로 ‘난 진정 몰랐었네’를 부르던 장면이 기억난다. 최병걸에 대한 대중의 기억은 그 곡 하나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고, 그러니 그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서 ‘진정 난 모를’ 수밖에 없다.

조경수는? 조경수에 대한 기억은 조금은 다양하다. ‘아니야’와 ‘행복’ 외에도 디스코 댄스곡 ‘징기스칸’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곡을 부르던 무렵이 1979년께이니 그 무렵 나이트클럽의 댄스플로어에서의 유행도 ‘고고에서 디스코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 나이트클럽의 성격 자체가 바뀌고 있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룹 사운드가 연주하는 고고 클럽’이 아니라 ‘판 틀어주는 디스코텍’으로. 이 시기 스타 가수들의 운명도 유행의 변화처럼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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