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개막하는 연극 <몽땅 털어놉시다>에 출연하는 원로 배우 윤문식(79). 스튜디오 쉼표 제공
원로 배우 윤문식(79)은 요즘 날마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 종로구 대학로로 향한다. 연극 <몽땅 털어놉시다>(주호성 연출)의 연습을 위해서다. “간단한 역이니 대충대충 나와도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그게 어디 그럽니까. 굿쟁이들은 장구 치는 데 가야지, 집에서 뭐 한대요? 매일 출근합니다. 하하.” 8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윤문식을 만났다. 30년 세월, 3천회 넘는 마당놀이판에서 관객들 울리고 웃긴 관록의 배우는 여전히 걸쭉한 입담을 풀어냈다. 유머도, 해학도 녹슬지 않았다.
이 연극을 제작한 극단 ‘시민극장’은 그와 여러모로 인연이 깊다. 2017년 이 극단의 <싸가지 흥부전> 제천 공연을 2개월 앞두고 있을 때 병원에서 ‘폐암 3기 후반, 시한부 목숨’이란 판정을 받았다. “앞이 캄캄해집디다. 얼마나 살 수 있냐고 물어보니 7개월이라고 해요. 어차피 죽는다는데 공연이나 실컷 하고 죽어야지 싶어 항암 치료 거부하고 병원을 뛰쳐나왔어요. 그러고는 연습을 계속했지요.” 그런데 아내가 오진일 수도 있으니 한번만 더 진찰을 받아보자고 끈질기게 권유했다. 결국 다른 병원에서 재진을 받았는데 결과가 ‘폐암 1기’로 뒤집혔다. “두달 뒤에 그 공연을 끝마치고 수술을 했어요. 지금은 쌩쌩해요. 5년 전에 없어졌을 사람인데 아내 덕분에 더 사는 겁니다. 허허.” 그는 2009년 아내와 사별하고 1년 뒤에 18살 연하인 지금의 아내와 재혼했다.
원로 배우 윤문식(79)이 오는 18일 개막하는 연극 <몽땅 털어놉시다> 공연에 앞서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있다. 극단 ‘시민극장’ 제공
배우는 죽을 때까지 현역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정치판에선 선배들더러 후배들 위해 물러나라고들 하는데, 굿판의 굿쟁이들은 그러지 않아요. 카자흐스탄 알마티 극장에 가본 적이 있는데, 인기 있던 주연 배우들도 늙어서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대사를 못 외우면 의상을 담당하게 합니다. 연극판 근처에서 죽게 하는 거지요. 우리나라 남사당도 연희 기능을 상실한 늙은 단원을 저승패라고 부르면서 같이 데리고 다녔어요.” 아닌 게 아니라 공연판만큼 연로한 이들이 나름의 역할을 하는 곳을 찾기 힘들다. 윤문식은 그 이유를 돈에서 찾았다. “여긴 돈이 없잖유. 만약에 큰돈이 도는 곳이라면 늙은이들 얼쩡대는 게 용납이 됐겠어요?”
그는 배우보다 광대로 불리길 원했다. <맥베스> <햄릿> <십이야> 등 셰익스피어 연극을 10여편에 출연했는데 그가 맡은 배역이 모두 광대였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할 당시에도 검열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시류를 비판하거나 정부를 욕하는 대사는 죄다 광대가 했어요. 셰익스피어도 진짜 하고 싶은 속내는 광대 입을 빌려서 했다고 봐요. 연극에선 광대가 최고지요.” 욕도 윤문식이 하면 맛깔나게 들린다. “이런 싸가지 없는 것들”이라고 호통을 쳐도 기분 나쁘지 않다. 신기하고 특출난 재주다. 마당놀이판에서 관객들과 소통하며 부대낀 공력 아닐까 짐작해본다.
드라마 <추노>에 출연한 윤문식. 영화사 하늘 제공
‘마당놀이 인간문화재’란 별칭까지 붙은 그에게 마당놀이의 핵심은 풍자와 해학이었다. “마당극에선 ‘오늘날 이 마당에’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마당이란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진 개념인 거죠. 당시 이슈를 재미나게 애드리브 쳐서 현장감 있게 살려내는 데 마당놀이의 묘미가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물었더니 1980년 마당세실극장에서 공연했던 최인훈 원작 <놀부뎐>을 꼽았다. “이 공연을 53차례나 봤다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형님, 나는 갚는다면 갚는 놈이요’란 대사가 유명했지요.” 그 대사는 10·26 당시 김재규가 했다는 ‘형님, 저는 한다면 합니다’를 패러디한 거였다.
그에게서 ‘예술의 과학화’ 얘기가 나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중국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막 공연 감상평에서다. “장충체육관에다 엘이디(LED) 바닥 깔고 심청전 공연 하면 기가 막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배 띄워라~’ 하면서 엘이디로 만든 인당수에 파도가 넘실대고 심청이 풍덩 빠지고 하면 정말 볼만할 거 아닙니까. 개막 공연 보는데 그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마당의 활기를 잃어버린 시대, 그는 엘이디일지언정 마당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가 참여한 마지막 마당놀이 공연은 스마트폰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2010년이다.
2008년 11월에 윤문식이 출연한 마당극 <심청>의 한 장면. 극단 미추 제공
어떤 배우가 좋은 배우냐고 물었더니 “싸가지 있고 끼 있는 배우”라고 했다. 그러면서 “올챙이 적을 잊어버린 개구리는 싸가지 없는 배우”라고 덧붙였다. “요즘 너무 급해요. 목적이 연극이 아니라 딴 데 있어요.” 캐스팅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나한테 햄릿 역할 맡기면 그 연극 망해요. 예전에 나한테 청춘남녀 연애하는 역할을 시키는데 그건 죽어도 못하겠더군요. 제발 빼달라고 해서 겨우 살았어요. 정치에서도 대통령이 장관 잘 뽑고 인사 잘하는 게 최고잖아요. 배우는 감독과 연출의 요구를 눈치껏 연기하면 되는 거고요.”
그가 출연하는 <몽땅 털어놉시다>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한 여행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과 삶의 진실을 만나는 작품이다. 오는 17일 개막하는 ‘늘푸른연극제’ 참가작으로, 18~20일 대학로 제이티엔(JTN) 아트홀에서 선보인다. 작품 출품이 결정된 당일인 지난해 9월 시민극장을 창단한 연극인 장남수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 “대학 후배인 장남수의 권유로 공연에 참여했는데, 그를 기리는 추모공연이 돼버렸어요. 대학 은사인 이근삼 원작 작품인데 재미있습니다.” 국내 연극계에 기여한 원로 연극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취지로 올해 6회를 맞는 이 연극제는 배우 출연 조건이 ‘70살 이상’이다. 전무송이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정욱, 손숙, 유진규, 기주봉 등 원로 배우 300여명이 출연한다. <물리학자들> <건널목 삽화>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등을 선보인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윤문식 등 원로 배우들이 출연하는 연극 <몽땅 털어놉시다>는 6회를 맞는 ‘늘푸른연극제’ 참가작이다. 극단 춘추의 <물리학자들>, 방태수 연출의 <건널목 삽화>, 이병훈 연출의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등 4편이 공연된다. 늘푸른연극제 사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