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 푸틴’ 러시아 피아니스트 대신 긴급 투입 빈필과 리허설도 없이 곧바로 라흐마니노프 곡 협연 뜨거운 반응에 앙코르 연주도…“잊을 수 없는 경험”
25일(현지시각) 저녁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지해온 러시아 피아니스트를 대신해 ‘긴급 대타’로 투입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야니크 네제세갱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를 마치자 청중이 기립박수를 보내며 환호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25일(현지시각) 저녁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 ‘긴급 대타’로 투입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야니크 네제세갱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빈필)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를 마치자 끝없는 환호가 터졌다. 5층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청중 대부분이 일어선 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독일 베를린에 머물던 조성진은 카네기홀과 빈필의 다급한 요청에 곧바로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간이 빠듯해 리허설도 거의 못 한 채 무대에 올라야 했다. 연주 시간이 40분에 가까운 난곡으로 꼽히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그것도 함께 연주해본 적이 없는 오케스트라와 리허설도 없이 곧바로 연주한다는 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청중의 뜨거운 반응에 조성진이 선택한 앙코르 곡은 차이콥스키의 ‘사계’ 가운데 ‘10월’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러시아 연주자들이 교체된 공연에서 러시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콥스키의 곡이 잇달아 연주된 것이다. 조성진과 빈필의 첫번째 협연은 이렇게 역사에 남을 연주가 됐다. 공연이 끝난 뒤 조성진은 트위터에 “잊을 수 없는 경험”이라고 소감을 올렸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왼쪽)이 25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야니크 네제세갱(오른쪽)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라와 협연한 뒤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사진. 조성진 트위터 갈무리
이 모든 일이 하루 만에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원래 세계적인 러시아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68)가 빈필을 지휘해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와 협연할 예정이었다. 게르기예프와 마추예프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카네기홀도 처음엔 두 사람의 공연을 강행하려 했으나 계르기예프의 공연을 앞두고 트위터에 ‘#CancelGergiev’(게르기예프를 취소하라)가 퍼지는 등 부정적 여론이 들끓자 방침을 바꿨다. 카네기홀은 결국 공연 하루 전인 24일 이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카네기홀은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한다”며 지휘자를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음악감독 야니크 네제세갱으로 교체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협연 피아니스트를 누구로 교체할지는 밝히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냈다. 카네기홀은 공연 당일인 25일에야 조성진이 나서기로 했다고 전했다. 카네기홀과 빈필은 독일 베를린에 머물던 조성진이 긴급히 나서준 데 대해 깊은 고마움을 표시했다.
게르기예프는 그동안 노골적으로 푸틴을 지지해왔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를 침공해 합병하자 러시아 문화예술계 인사 19명과 함께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98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마추예프도 이 서명에 함께했다. 게르기예프는 푸틴이 세번째 대선에 출마했을 때도 방송에서 지지 연설을 했다. 앞서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공했을 때도 공공연하게 푸틴을 지지했다.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총감독과 독일 뮌헨 필하모닉 수석지휘자를 맡고 있는 발레리 게르기예프. <한겨레> 자료사진
게르기예프에 대한 유럽 각국의 압력도 높아지고 있다. 독일 뮌헨의 시장은 게르기예프에게 시한까지 제시하며 ‘푸틴의 잔혹하고 호전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명확한 의견 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응하지 않으면 그가 맡고 있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직을 박탈하겠다는 압박이었다. 그는 임기를 3년이나 남겨두고 있다. 그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명예지휘자 직책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시장은 푸틴과 단절하지 않으면 예정된 라스칼라 극장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게르기예프에게 통보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총감독을 맡으며 푸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온 게르기예프는 아직 침묵을 지키고 있다.
푸틴의 행위를 비판하고 나선 러시아 출신 음악인도 많다.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키릴 페트렌코는 푸틴의 행위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베를린필은 우크라이나 희생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을 연주하기로 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그동안 푸틴을 지지했으나 “나는 이 전쟁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체코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세묜 비치코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히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대부분 러시아에 거주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공개적으로 푸틴 거부를 선언하라고 압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나 네트렙코는 ‘전쟁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도 “예술가들에게 정치적 의견을 말하거나 조국을 비난하도록 강요해선 안 된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한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