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신작 창극 <리어>에서 주역을 맡은 ‘국악 아이돌’ 김준수. 국립창극단 제공
“천사 같구나/ 하지만 왜 이렇게 차가울까/ 이건 물고기다/ 물고기가 죽었어/ 다시 살아날까/ 강물에 넣어주면…”
2일 오후 서울 남산 자락에 자리 잡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연습실. 모든 걸 잃고 ‘광인’이 된 리어왕이 막내딸의 주검 앞에서 처연한 대사를 읊고 있었다. 신시사이저 전자음 사이로 북과 장구 소리가 장단을 맞추더니 절정에 이르자 팀파니와 심벌즈까지 합세해 요란하게 울려댔다. 국립창극단 단원들이 신작 창극 <리어> 연습에 몰두하는 현장이다.
지난해 88살 노배우 이순재가 연극에서 ‘리어왕’을 맡아 화제가 됐는데, 이번엔 31살 청춘의 ‘국악 아이돌’ 김준수가 리어왕으로 등극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리어왕은 나이 지긋한 중견 연기자가 맡는 게 보통이다. ‘젊어선 햄릿이요, 늙어선 리어’가 이쪽 동네의 불문율에 가깝다. 그래서 ‘시퍼렇게 젊은 리어’가 연기하는 리어는 어떤 모습일지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오는 17일부터 27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창극 <리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국립창극단 신작 창극 <리어>에서 주역을 맡은 ‘국악 아이돌’ 김준수가 대본을 들고 있다. 국립창극단 제공
3시간 가까이 노래와 대사에 온몸을 던져 몰입하다가 막 연습을 끝낸 김준수는 지쳐 보였다. 하지만 프로답게 인터뷰가 시작되자 이내 눈빛이 반짝였다. “나이듦이라는 게 이 작품의 핵심은 아니거든요. 노인이 되려 하지 않을 겁니다. 노인처럼 꾸미지 않고 제 모습 그대로 보여드리는 거죠.” 연출가 정영두는 연습 중간중간 김준수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지시를 전달했다. “연출님은 제가 즐겼으면 좋겠대요.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라고요.” 김준수는 “관객이 늙은 왕 리어의 이미지가 아니라 극의 흐름과 대사, 감정선에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김준수는 다재다능한 예인이다. 소리꾼에 춤도 가미된 창극에도 출연하면서 뮤지컬 가수로도 활동 중이다. 판소리 <수궁가>를 완창했고, 창극 <패왕별희>와 <트로이의 여인들>에선 여성 배역도 해냈다. 지난해엔 국악 오디션 프로그램 <풍류대장>(JTBC)에 나가 준우승을 차지하며 인기를 끌었고, <불후의 명곡>(KBS2)에 출연해 판소리로 다진 가창력을 선보였다. “제가 소리를 했기 때문에 이 모든 역할을 할 수 있었죠. 제 뿌리는 소리입니다.” 그 어떤 호칭보다 ‘소리꾼 김준수’로 불리길 원하는 그의 꿈은 “장장 6시간에 이르는 <춘향가>를 완창하는 일”이라고 했다.
셰익스피어 연극을 창극 <리어>로 각색한 극작가 배삼식(왼쪽)과 연출과 안무를 맡은 연출가 정영두. 국립창극단 제공
연습실에서 살짝 엿본 창극 <리어>는 음악이 많은 걸 얘기하는 작품인 듯했다. 대사 내용과 극의 분위기에 따라 음악도 함께 흘렀다. 비장한 대목에선 계면조의 느린 장단이었고, 극이 급속히 전개되면 타악기의 리듬도 빨라졌다.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가 정재일은 이번에도 특유의 매력적인 색깔을 뿜어낸다. 정재일과 여러차례 호흡을 맞춰온 김준수는 “‘정재일표 음악’이 주는 힘이 굉장하다. 캐릭터마다 다르게 음악적 색깔을 입힌 것 같다”고 전했다. 작창과 음악감독을 맡은 한승석은 정재일과 긴밀하게 호흡을 맞춰온 사이다. 두 사람은 크로스오버 앨범 2장을 내기도 했다.
주요 희곡상을 휩쓴 정상급 극작가 배삼식은 이 고전을 우리 입맛을 살려 맛깔스럽게 풀어낸다. 거기에 노자의 ‘물의 철학’을 입혔으니, 극은 그 유명한 <도덕경> 8장의 첫 구절로 시작한다. “상선(上善)은 약수(若水)일러니, 만물을 이로이 하되 다투지 아니하고 모두가 저어하난 낮은 곳에 처(處)하노라.” 배삼식은 최근 간담회에서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잔혹한 리어왕을 읽다가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며 “모든 존재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데, 소멸을 앞둔 존재를 가엽게 생각하길 바라며 극본을 썼다”고 말했다.
창극 <리어>의 음악을 맡은 작곡가 정재일은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서 빼어난 음악을 들려줬다.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리어>에서 음악감독과 작창을 맡은 한승석은 작곡가 정재일과 앨범을 내는 등 긴밀하게 호흡해왔다. 국립창극단 제공
배삼식이 담아낸 ‘물의 철학’을 무대미술가 이태섭은 너비 14m, 깊이 9.6m의 무대 세트에 20t의 물을 채워 형상화한다. 수면의 높낮이와 흐름의 변화를 통해 극 중 캐릭터의 정서를 표현해낸다는 구상이다. 이태섭은 지난해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관록의 무대디자이너다. 작품에서 비중이 높은 ‘글로리아’ 역은 여섯살 때 판소리 <흥보가>를 완창해 ‘국악 신동’으로 불렸던 유태평양이 맡는다. 그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수궁가> <심청가>까지 세 바탕을 완창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