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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연극평론가 안치운이 만난 ‘국립극단 예술감독’ 오태석

등록 2006-02-19 18:08수정 2006-02-20 11:33

최근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연극연출가 오태석(오른쪽)씨와 연극평론가 안치운씨가 16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옥상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최근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연극연출가 오태석(오른쪽)씨와 연극평론가 안치운씨가 16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옥상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악바리 근성으로 국립극단 이끌어야죠”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연극 연출가 오태석(66)씨가 최근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됐다. 극단 목화레퍼토리컴퍼니를 이끌며 한 번도 곁눈질을 한 적이 없는 그로서는 첫 ‘외도’인 셈이다. 동랑 유치진의 권유로 인연을 맺게 된 서울예술대학(극작과)과의 인연도 이달 말이면 끝난다. 연극평론가 안치운(49)씨가 그를 만나 연극과 인생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오태석
“나를 감추려 썼던 마스크 이젠 벗을 때
소품 만들다보면 배우는 더 생각하게 돼
관객은 구경꾼이자 연출이자 책임자

안치운
“어릴 때 겪은 전쟁이 힘이자 한계 아닌지
시간의 주름 안는 수공업적 방식 소중해
연극은 첫사랑같은 아마추어의 열정”

안치운=연극작가가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영화 한 편으로 이름을 알린 영화감독보다 못한 오늘날, 연극하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선생님의 궤적은 매우 크고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의 연극과 그렇지 않은 일상의 삶과의 길항 혹은 친연, 그 사이 선생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오태석=뭔가 하나는 포기해야 했어요. 저는 낮에 한 30분 집중할 수 있고, 저녁에 30분 집중할 수 있는데, 그 30분을 위해 다른 것을 등한시한다고 할까? 일상의 다른 일은 웬만한 것은 차단하는 것 같아요.

=희곡과 연극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어릴 때 경험하신 상처, 전쟁이나 가족사의 비애, 죽음, 이런 것들이었거든요. 그것이 선생님이 연극을 할 수 있는 힘이었지만, 다른 한편, 한계였던 것은 아닐까요?

=부친이 법관이었는데, 경무대에 드나드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두 손을 결박당한 시늉을 하며) 이렇게 돼서 가더란 말이죠. ‘아, 인생이 만만치 않구나’, 이렇게 여반장처럼 확 뒤집어지는 것이로구나,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한 거로구나, 하는 것을 알았죠.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마스크를 썼던 것 같아요.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용케도 요령을 가지고 버무려가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허구’라는 것을 만들기는 한 것 같아요. 문제는 그렇게 너무 쉽게 가니까 족쇄가 되는 거죠. 지금은 거기서 더 퍼올릴 게 없어요. 마스크도 너무 낡아서 마스크 구실을 못해요. 이제 내 얼굴이 드러난 거에요. 그래서 당황스러운 거죠. 지금부터 제대로 세상하고 맞짱을 떠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오 “이젠 세상과 제대로 ‘맞장’ 떠야죠”

=오태석의 연극을 말할 때 가장 흔한 것이 한국적, 전통적, 제의적 등의 수식어인데요, 이런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국전쟁 때 부친은 북으로 끌려갔고, 작은 아버지도 길거리에서 잡혀서 인민군으로 갔어요. 할머니로서는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거죠. 어머니는 서른하나에 혼자가 돼서 넷이나 되는 애들을 데리고 살았죠. 산다는 것이 죽음과 동반해 가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그 두 여자들이 끊임없이 보여줬죠. 그런 것이 제 작품에서 제의적인 상태로 드러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장독대라든지, 뒤안의 대숲이라든지, 그 옆에 채전밭, 마을 어귀, 돌아가면 사람이 안 보이는 모랭이, 장꾼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뒷길, 제가 혼자 서 있다고 하면 그런 것들이 배경을 만들어주거든요. 그것이 한국적인지 뭔지는 모르죠.

=그것이야말로 오태석의 연극을 길어올리는, 고갈되지 않는 우물 같은 것이죠.

=안 선생 말씀하시듯, 그게 저를 좁게 만드는 거죠. 그런 조건이 아니었다면 다른 좋은 상상이나 방법론을 만들어 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비평가들은 그런 걸 깊이 설명한다기보다 양식화하려 합니다. 거리나 시선, 무대 높이 그렇게 나누는데, 선생님 연극을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처음엔 서양에서 배웠죠. 흉내도 많이 냈고. 동양의 볼거리를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말만 조금 느리게 “아이구 내 강아지야~”, 하면 노래가 돼요. “한 단이요, 두 단이요.” 배추 몇 단 옮기는 것도 노래가 되고. 판소리의 생략과 비약, 거두절미하고 넘어가는 기능을 조금 더 확대하면 관객이 단지 구경하는 게 아니라 연출도 하고 책임도 지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우리 것에 있어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전통을 수용하면, 뮤지컬에 빼앗긴 관객들과도 찾아올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올해 영국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할 예정이시죠.

=180석짜리 바비칸 소극장에서 15일 동안 공연해요. 무대설치까지 포함하면 20일 정도 있는 거죠. 서른 몇명이 20일 넘게 체류하는 것은 바비칸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래요.

=극단 목화의 수공업적 방법, 집단적 제작, 이런 것들이 연극 동네에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연극의 뮤지컬화 속에서 시간의 주름 같은 것을 스스로 안는 작업 방식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80년, 일본에서 <초분>을 할 때, 일본 배우들에게 전부 종이옷을 입혔어요. 누가 만들어주나요? 자기들이 만들어야지, 양면테이프로 붙여가면서. 오후 4~5시쯤 나와서 그걸 만드는데, 하다보면 연극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 거기에 내 속임수가 있는 거에요. <로미오와 줄리엣>도 소품을 전부 배우들이 만들어요. 디자인은 전문가가 하지만, 수선도 다 우리 애들이 하죠. 생각은 손의 연장이죠.

=조명이나 의상을 맡은 분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할 수 있는 비결은 뭡니까? 특히 조명은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요.

=박범신의 <불의 나라>가 신문에 연재될 때였는데, 일본 애들이 그걸 연극으로 하자고 했어요. 도쿄 시부야에 있는 파르코 극장에서 했는데, 그때 그 친구(아이카와 마사아키)가 무대감독이었죠. 현지에서 밤을 새워 연극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사라진 모습이 여기 있으니까 그걸 찾아온 거죠. 그 사람이 일본 부토 조명의 일인자에요. 부토는 빛깔이 그 사람 내면을 얘기해주거든요. 나한테 딱 맞죠. 이 친구가 돈 같은 것은 생각 안 하고 와요. 비행기 값하고 약간의 사례비, 김치하고 김 몇 장 집어주죠. 의상하는 친구(이승무)는 일본에서 3년, 이탈리아에서 6년 공부했는데, 스포츠웨어를 전공했어요. 그 빛깔에 우리 빛깔 섞어서 해보자고 해서 <백마강 달밤에>를 했는데, 무당한테 연미복을 입히고, 엉뚱한 짓을 다 했어요. 옷이 가지는 힘을 알더라고. 그렇게 한 번 하더니 발을 못 빼더라고요.

안 “한국적인 것이 오태석 연극의 우물”

=선생님이 작품을 쓰고 연출하고, 이런 분들이 무대를 맡고, 제자들이 연기를 하는, 우리 현대 연극에서 드문 체제입니다.

=바보같은 일이죠. 사제지간이니까 가능한 거에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런 문제들과 연극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홀로서기가 없어요. 집단의 움직임, 집단 이기심이 풍미해요. 군사정권 때는 어쩔 수 없었다해도, 40년 이상이 지났는데, 난감하죠. 어린 애들도 핸드폰을 안 가져오면 수업 포기하고 가지러 가요. 그게 있어야 자기가 존재하죠. 전철을 1시간 동안 타고가는데 30~40분 동안 통화를 해요. 하다못해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도 읽어야 하는데. 정보화될수록 외로워져요. 외로움을 감당할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해요. 혼자 있으려면 지식이 있어야 하고, 신념이 있어야 해요.

=국립극장 얘기를 안 할 수 없네요.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요.

=국립극단은 볼거리 문화를 끌고 가는 수표교 같은 존재가 돼야죠. 그런데 전용극장이 없다 보니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것과 똑같은 형태로 해요. 2달 연습해서 1주일 공연하고 없어져버리고. 어떤 지향이 없어요. 이제 6개월 연습해서 한달이든 두달이든 공연해야죠. 제가 양아치, 주먹이니까, 꽉 물면 안 놓는 ‘개고기 근성’으로 해야죠. 다시 옛날로 가야죠, 좌충우돌하던 시절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기자가 쓴 글 중에 인상적으로 본 것이 “모든 사랑은 다 첫사랑이다”는 겁니다. 아마 연극은 첫사랑처럼 즐거움, 불안, 흥분, 순수, 아마추어 정신, 습작이란 말과 동의어가 아닐까 합니다. 연극이란 것, 일상의 삶까지도 그런 첫사랑과 같은 아마추어의 열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국립극단에서 하시는 일이 서울시립극단 등 다른 국공립 극단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쎄, 그건 숙제죠. 올해가 병술년인데, 음력으로는 입춘이 두 번 있는 해에요. 2000년에 12번 온다고 하네요. 지금 중국에서는 가게마다 난리가 났어요. 우리도 병술년 맥주나 한잔 하러 갑시다.

정리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오태석은...

1940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웨딩드레스>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 <초분>으로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작품상을 받는 등 한국 연극계에서 가장 많은 상을 받았다. 한국 최초로 해외 공연을 했다. 저서로 <북소리 울릴때(산문집)>, <백마강 달밤에>, <오태석 희곡전집(전4권)>이 있으며, 작품집으로는 <자전거>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환절기> <초분> <태> 등이 있다.

안치운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 연극학과를 졸업했다.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파리 국립 3대학에서 연극교육학에 관한 논문을 써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1회 여석기 연극평론가상, 제1회 피에이에프 비평상 등을 받았다. 현재 연극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호서대학교 예술학부 교수로 있다. <공연예술과 실제비평> <연극 감상법> <추송웅 배우의 말과 몸짓> <한국 연극의 지형학>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 <연극, 반연극, 비연극>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대담전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연극 연출가 오태석(66)씨가 최근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됐다. 극단 목화레퍼토리컴퍼니를 이끌며 한번도 곁눈질을 한 적이 없는 그로서는 첫 ‘외도’인 셈이다. 동랑 유치진의 권유로 인연을 맺게 된 서울예술대학(극작과)과의 인연도 이달 말이면 끝난다. 연극평론가 안치운(49)씨가 그를 만나 연극과 인생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안치운

연극작가가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영화감독보다 못한 오늘날, 연극하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선생님의 궤적은 매우 크고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의 연극과 그렇지 않은 일상의 삶과의 길항 혹은 친연, 그 사이 선생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오태석

뭔가 하나는 포기해야 했어요. 저는 낮에 한 30분 집중할 수 있고, 저녁에 한 30분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30분을 위해 다른 것을 등한시해야한다고 할까? 저는 컴퓨터 잘 못하거든요. 핸드폰 잡으면 쩔쩔매요. 일상의 다른 일은 웬만한 것은 차단하는 것 같아요. 그 30분이 어느 순간에 생길지 모르지만, 그 때를 위해 저도 모르게 힘을 저축한다고 할까요?

힘드셨던 적은 없나요?

저는 부친이 마음에 많이 걸려요. 발을 쫙 펴고 눕는다는 것도 죄가 되는 것 같은…. 결박당해서 끌려가는 것을 봤으니까요. 그 분이 결박당한 상태를 편다는 것은 힘들지 않겠어요? 내가 펴드릴 수도 없죠. 그 분이 지금도 감옥에 있다면 주먹밥 하나 잡수실 거란 말이죠. 맛있는 거 먹어볼까 그런 생각이 안 들죠.

제가 국민학교 4학년 때 6·25 현장을 봤거든요. 가령 ‘천년의 수인’이라고 할까. 나도 수인이지, 그런 생각을 항상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살았는지 몰라요. 다른 것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지금까지 여러 작품에 원죄의식처럼 따라다녔고, “아직 탈상도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런 말씀도 하셨어요. 오 선생님의 그런 개인적 경험이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요?

아마 제가 가진 부친에 대한 기억, 상실 같은 것을 그네들 나름대로 또 만들어서 가겠죠. 이를테면 정보매체에 둘러싸여 꼼짝도 못한다든지.

제 고민 중 하나가 이런 겁니다. “안치운 요새 뭐해? 네, 연극 선생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 사회가 저를 보는, 연극을 통해서 저를 보는 눈높이들이 있을 텐데, 제가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는 건가,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사회가 연극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말씀해주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인스턴트죠. 많은 게 이미 만들어져 있잖아요. 예전에는 구두나 옷도 다 맞춰입었는데, 지금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에, 제품화된 것에 자기를 맞추는 거죠. 손두부나 손칼국수 같은, 그 사람 아니면 안되는 그런 것이 당신한테도 있다,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으로서 내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사람 안에 많은 방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하고 만났을 때 내가 그 방 열쇠를 줄 수 있다면, 다행히 나의 어느 작품이, 그 사람 내면의 방을 열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일을 나는 해야 한다, 그런 거 가지고 가죠.

선생님께서는 연극계의 상이라는 상은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받지 않으셨어요?

허허허. 그거 잘 못된 거에요.

한국 연극의 대가를 대하는 태도가 한국 사회가 연극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우리 사회가 너무 연극에 소홀하기 때문에 선생님 은퇴 즈음해서도 여러모로 부족함을 느껴왔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신이 소중한 사람이다’, 그렇게 말해줄 수 있으면 좋은 거에요. 남들처럼 팍팍 찔러주지는 못했을지언정, 안개비처럼 서서히, 어? 속옷까지 젖었네? 내가 그런 인자가 됐으면 하는 거죠. 결국, ‘젖었네’ 하는 것은 ‘아, 내가 살고 있구나’, ‘내가 소중하구나’ 하는 거니까요.

한국 연극이 관객에게 이런 걸 못 줬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내 깊이나 생각이나 이런 게 딸려요.

저는 반대로 연극을 통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자기 방의 문을 열려고 하지않거나 무감하게 지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합니다.

무감한 것을 해체해 줘야죠. ‘나’를 보는 게 습관이 된다면 말이죠. 미술관도 자주 가야 습관이 되거든요. 연극도 ‘아, 연극 본지 오래됐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돼야죠. 그걸 못하는 것은 제가 짧기 때문이에요. 우물에 두레박을 내렸는데, 촥~, 하고 올라왔으면 좋겠는데 이게 덜그럭덜그럭 하고, 한 줌 올라올까 말까 하고, 빈곤해요.

저는 핑계삼아 한 1~2년 안식년이라도 가져봤으면 좋겠다. 책만 쳐다보면서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도 좀 보고, 세계를 구름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을 훑어보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바둑두는 사람이 초읽기하는 것처럼 돌아가니…. 이제 겨우 숨을 쉬는구나 하는 작품을 만드는 데 10년이 걸리더라구요. 몇 군데가 비로소 잘 넘어가는데, 애들이 저건 알고 하네, 그런 거 만드는데 10년이 걸려요. 역시 모자란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연극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만만치 않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장치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것이 제 연극의 발상이기도 합니다. 삼촌이 잘못해도 내가 조카가 아니라며 빠질 수 있는 방법, 이념의 문제 앞에서도 나는 무관하다며 빠질 수 있는 무슨 장치가 있어야겠다는 것을 절감한 데서 온 발상이지요. 죽음의 실체를 많이 보아왔고, 그것에 대한 절감이 저로 하여금 일종의 마스크를 쓰게 했습니다. 저의 전체를 드러내는 법이 없이 한 발짝 빼서 달아날 준비를 한 자세로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느 쪽에서 뭐가 날아오더라도 달아날 준비, 표정 관리, 이런 것들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운영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연극과 인생, 2000년 4월14일)

지금까지 말씀이나, 희곡과 연극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어릴 때 경험하신 큰 상처, 전쟁이나 가족사의 비애, 죽음, 이런 것들이었거든요. 다른 분들도 공감하는 거구요. 그런데 그것이 선생님이 연극을 할 수 있는 힘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 한계였던 것은 아닐까요?

부친이 법관이었는데, 경무대에 드나드셨어요. ‘그래 평생 이렇게 가는 것이지’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두 손을 결박당한 시늉을 하며) 이렇게 되서 가더란 말이죠. ‘아, 인생이 만만치 않구나’, 이렇게 여반장처럼 확 뒤집어지는 것이로구나.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한 거로구나, 하는 것을 알았죠.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마스크를 썼던 것 같아요.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용케도 요령을 가지고 버무려가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허구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는 한 것 같아요. 문제는 그렇게 너무 쉽게 가니까 족쇄가 되는 거죠. 만약 그런 일 없이 경무대 시절이 그대로 계속됐으면 또 다른 세계를 잡으려고 애를 썼을 것 같은데. 지금은 덜그럭덜그럭 한다는 얘기가, 거기서 더 퍼올릴 게 없다는 거죠. 마스크도 너무 낡아서 마스크 구실을 못해요. 이제 내 얼굴이 드러난 거에요. 그래서 당황스러운 거죠. 지금부터 제대로 세상하고 맞짱을 떠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선생님 자신에게 연극이란, “현실보다는 허구 쪽의 나를 운영하는 쪽, 즉 ‘내가 만든 세상’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또 가치 전도에서 빚어지는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연극방법이나 태도를 보면, 과연 스스로 편안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70~80년대 밖에서는 사회적 격랑이 몰아쳤는데, 내적인 고민에 머물러 계셨던 것은 아닌가요?

어떻게 말하면 비겁하다고 할까, 숨어왔단 말이죠. 숨는 재주 때문에 허구에서 인정을 받았다 치죠. 이제 그야말로 전체가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요. 왜 우리는 남들이 다 버린 이데올로기에, 내 생애 전체를 통과하도록, 아직도 굳세게 머물러 있나, 아직도 해결을 못하고 있단 말이죠. 게으름이나 통찰력 부족일 수도 있고, 바보들이구나 우리는,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죠. 그렇기 때문에 한사람 한사람의 됨됨이, 왜 이렇게 무능력하고 게으른지, 투철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주춤주춤 내일내일 미루면서 가는지, 그것이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 모자란 부분이 있는 것인지, 그걸 자꾸 물어보게 돼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데,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 몇퍼센트나 차 있는 건지, 그런 것 때문에 우리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가, 남의 것을 인정하고 내 것을 해야 하는데, 내가 초라한 거죠.

이런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 그동안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의 창작 동기, 개인의 역사를 인정하고, 그것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큰 힘이라는 걸 알지만, 또한 선생님을 옥죄는 것이 아닌가요?

저는 절감해요. ‘넌 사기꾼이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게 좀 모자라요. 가혹하게 나를, 내 스스로 마주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슬슬 넘어가주니까 타성이 붙은 것 같아요.

선생님은 한국의 현대 연극을 대표하고, 한국 연극의 미래까지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태석의 연극을 말할 때 가장 흔한 것이 한국적, 전통적, 제의적 등의 수식어인데요, 이런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국전쟁 때 부친은 그렇게 됐고, 작은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잡혀서 인민군으로 갔어요. 할머니로서는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거죠. 어머니는 서른하나에 혼자가 돼서 넷이나 되는 애들을 데리고 꾸리면서 살았죠. 억척어멈 식으로 사상이니 뭐니 아무것도 없이, 입에 풀칠은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산 거죠. 저는 할머니께서 두 형제를 갑자기 잃으시고 견뎌가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 일찍부터 죽음을 알게 된 거에요. 할머니는 당신은 안 돌아가셨지만 당신도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화가 나시면 “내 숨쉬는 지 아냐?”고 그랬죠. 그런 말을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했고, 부친을 찾아보겠다고 서울에 남아서 점령지에서 헤매다 결국 포기하기도 했구요. 산다는 것이 죽음과 동반해 가는, 그림자처럼 같이 가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그 두 여자들이 끊임없이 보여줬죠.

실종신고를 하면 3년이 지나야 사망으로 인정해 주잖아요. 그런데 3년이 지나지 않아서 내 동생은 회사 시험에 떨어졌어요. 연좌제 때문에. ‘탈상’이라는 게 있더라구요.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니까 할머니가 3년 동안 아침상을 갖다주셔요. 왜 그러냐니까, 여기 왔다갔다하신다고 해요. 3년은 이를테면 준사망이랄까?

죽음과 동거하는 거겠죠.

막내딸 여읠 때는, 아버지 위패에 대고 ‘사람 하나는 무던하다’, 말씀도 하시고. 시체를 못봤으니 죽었다는 걸 실감을 못하는 거에요.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있는 것도 아니고, 3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라도 살아있는 것으로 하려는 바보같은 애틋함이 있죠. 그런 것을 제가 이 조그만 땅에 태어나면서 마주친 거죠. 그것과 동반해서 여기까지 온 거고. 3년 동안 시체를 보지 않은 그 상태, 실재와 비실재가 불분명한상태, 그런 것이 제 작품에서 제의적인 상태로 드러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오태석의 연극을 길어올리는, 고갈되지 않는 우물 같은 것이죠.

지지난해 모친 돌아가셨을 때 선산에 묻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장난 같지만 석관을 그 옆에 또 묻었어요. 여기다 언젠가 묻어들일 테니까 편히 가시라고 그랬어요.

항상 그런 것으로부터 떨어지지 못하시는군요.

그런거죠. 여전히 진행형이에요. 안 선생 말씀하시듯, 그게 저를 좁게 만드는 거죠. 그런 조건이 아니었다면 다른 좋은 상상이나 방법론을 만들어 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죠.

개인의 고민이 개인적으로 한정되지 않고 공동체의 것으로 이해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한국식이라는 것인데, 달리보면 선생님 연극을 옥죄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장독대라든지 뒤안의 대숲이라든지, 그 옆에 채전밭, 마을 어귀의, 돌아가면 사람이 안뵈는 모랭이, 장꾼들이 끊임 없이 지나다니는 조금 넓은 뒷길, 그 뒷길에는 귀신처럼 사람들이 희끗희끗하게 지나가죠. 그런 울타리가 저한테 있죠. 성찬이라면 닭 한마리 잡는 것이고. 제가 혼자 서 있다고 하면 그런 것들이 배경을 만들어 주거든요. 가지나 오이 따먹어다 무지하게 혼났던 일이나, 밤에 장꾼 지나가는데 ‘그냥 놔두면 웅덩이 빠진다, 짐승한테 잡혀먹힌다’며 집에 재우곤했던 할머니의 마음씀씀이, 그런 게 한상 제 주위를 맴돌아요. 거기서 또 이야기가 나오고. 그것이 한국적인지 뭔지는 모르죠. 하지만 그게 나한테는 소중한 거에요. 모랭이만 돌면 그 사람은 없는 거에요. “백짓장도 눈 앞에 놓아봐 앞 못보지. 사는 게 별거냐 발 아래가 저승이야”, 이런 말이. 저 자식 저거밖에 모르나 할 정도로, 그걸 작품으로 옮기는 거구요.

많은 비평가들이 쓴 글을 보면 그런 걸 깊이 설명한다기보다 양식화하려는 것으로 보여요. 거리나 시선, 무대 높이 그렇게 나누는데, 그것이 선생님 연극을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삼사십년 동안 연극이라는 것을 했어요. 처음엔 서양에서 배웠죠. 흉내도 많이 냈고. 그것이 수천년 살아온 우리하고는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는지, 그걸 생각 안할 수 없죠.

40년 하셨죠.

동양의 볼거리를 만들자고 생각했죠. 가부키나 노는 관객을 마주보면서 한한 말이이에요. 많은 세월을 바쳤기 때문에 정교하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우리 것은 안 그래요. 물론 우리도 노처럼 관객을 보면서 하는데, 일정한 틀이 없어요. 가령 살풀이만 해도 한영숙 살풀이와 김소희 살풀이가 같지를 않아요. 7~8분밖에 안되는데 지맘대로여. 장단도 미친년 속곳처럼 지맘대로 널뒤여. 빠를 때는 지랄맞게 빠르고 자연히 몸이 움직이게 돼 있단 말이죠. 처음엔 왜 가부키나 노 같은 형식을 못 만들었을까, 바보들 그랬어요. 그런데 일본애들은 죽겠다고 그래요. 전통에서 뭘 가져올 수가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해야하니까. 그런데 우리는 북채 쥐어주고 조금만 지나면 북을 쳐요. 말만 조금 느리게 “아이구 내 강아지야~”, 하면 노래가 돼요. “한단이요, 두단이요.” 배추 몇단 옮기면서도 노래가 되고. 전통이라는 것이 통째로 이전이 된다고 할까, 그런 전통이 아주 쉽게 들어와요. 또 ‘나 봐라’ 하는 게 아니고, ‘얼쑤~’, 같이 놀아보자고 하고, 객석에서도 적극적으로 참견을 하고, 소리하다가 “이게 자꾸 삐네”, 하면 관객들이 와르르 웃고, 자기는 잠깐 쉬고. 판소리의 생략과 비약, 거두절미하고 넘어가는 기능을 조금 더 확대하면 관객이 단지 구경하는 게 아니라 연출도 하고 책임도 지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우리 것에 은연중에 있어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면, 뮤지컬에 빼앗긴 관객들과도 찾아올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남들과 다르게 하려는 속성이 소중해요. 볼거리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특히 그렇죠. 그런 것을 확대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하는데요, 단점이 드러난 것 아닌가요.

지난해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했어요. 거기가 노천이고 꽉 찼을 때는 900명이 보거든요. 전부 젊은 사람이었어요. 치마저고리 입고, 우리 장단 기본이 골격이죠. 그것을 젊은 친구들이 잘 받아들이더라고. 대사도 구어체이고, 3·4조 4·4조인데, 멀지 않게 느끼더란 말이죠.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 것의 흐름, 몸짓, 소리, 장단, 치마저고리 빛깔, 그런 것을, 뭐랄까 배고픔처럼 갈구하는 그런 것이 있었나보다, 하고 신통하게 여겼어요.

저도 학생들과 술 마실 때 1, 2차는 대화가 잘 안되지만 3차부터는 되더라구요.

자꾸 대하게 해줄 필요가 있어요. 갑자기 그리스 로마신화 많이 보던데, 그거 재미없거든요. 왜 저럴까 싶었는데, 그쪽이 비어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서양에 너무 많이 치우쳐져 있어서 이쪽이 비어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뒷길, 대숲, 장독대 같은 것들이요. 장독대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내가 서너 살 위 고모가 있었거든요. 마당에서 노는데, 장독대 뒤에서 물소리 나면 고모가 샤워하는 중이라. 장독대는 여인들이 숨을 쉬는 곳이지만, 그런 애틋함이 있어요. 그런 것을 저는 자꾸 동원하려고 하고, 그런 데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오는 거죠.

올해 영국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할 예정이시죠. 런던에 있는 세익스피어의 클로버 극장에 갔더니, 세익스피어가 국제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저더러 어디서 왔냐고 물어요. 한국이라고 했더니, “보세요 세익스피어가 이렇게 세계적이에요”라고 하면서 세익스피어의 동시대성을 강조해요.

바비칸 소극장에서 15일 동안 공연해요. 180석인데, 아룽구지극장보다 조금 커요. 무대설치까지 포함하면 20일 정도 있는 거죠. 서른 몇명이 20일 넘게 체류하는 것은 바비칸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래요. 이 작품을 처음에 호암아트홀에서 하고 예술의 전당이 샀는데, 그 중간에 잠깐 틈이 있었어요. 그 때 러셀 브라운이라는 영향력있는 학자가 왔어요. 한국, 중국, 일본 연극을 비교해서 쓰려고 하는데 볼 게 없다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 공연이 없으니까 리허설이라도 보자고 해서 마침 비어있던 자유소극장에서 연습을 했어요.

그 사람 얘기가 “당신 작품을 가지고 와라. 한 20일은 해야한다. 그래야 기자들, 평론가들, 일반인들 다 볼 수 있다”고 해요. 그런데 바비칸으로서는 이게 나름대로 모험이거든. 전체 예산이 2억원이 넘거든요. 그러니 일단 그곳 사람들이 아는 걸 해보자, 해서 이렇게 됐어요. 칼자루를 쥔 게 바비칸이라.

<로미오…> 공연 팜플렛 문구 중에 “오태석의 화려한 한국식 세익스피어”라는 표현이 있어요. 관객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만든 문구지만 이게 과연 오태석 연극을 정확히 지적하는 것인가 묻게 되었어요, 독일 공연 평을 봤더니 “한국의 연극적 언어는 볼거리가 많다. 관객들이 즐길 게 많은 시각적인 언어로 충만하다. 모든 장면들이 마치 엽서에 담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이번 연극에서 말의 역할은 어쩔 수 없이 뒷전이 되고 말았다.”고 했더라구요. 볼거리 위주인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희곡으로 출발하셨고, 지금도 희곡을 쓰고 계시기 때문에 연극에서 말의 중요성 아실 텐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근 인도에 갔다왔는데, 거기는 10루피짜리 지폐가 있는데, 뒷면에 열다섯개 방언이 적혀있어요. 그런데 글자가 너무 틀려요. 하나가 뉴질랜드 글이라면 하나는 에스키모 글인 것처럼 비슷하지도 안아요. 그마저 공식 언어인 것이고, 방언은 800개나 돼요. 국립극단이 아예 없어요. 어느 특정 언어로 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가 굉장히 행복한 거구나’하고 느겼죠. 이렇게 좋은 언어로 연극을 하다는 게. 아래아까지 합쳐서 모음이 21개, 자음이 21개, 42개의 자모음을 가지고 구사못할 말이 없어요. 리뷰는 그렇게 안나왔지만, “세익스피어의 운문을 뜻밖에 당신들이 살려놓고 있다”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물흐르는 것처럼, 모음이 많고 받침까지 있고 그러니까, 우리 말의 흐름이 구사력이 좋다는 것은 자산으로 생각해요.

바비칸에서 온 여자가 공연을 보더니, “아름다운 것은 알겠는데, 옆에 앉은 관객들이 막 웃는데 자기는 못따라가겠더라”는 거에요. 나는 원래 자막 안넣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재밌으니까 웃는 거 아니냐, 나도 느끼고 싶다. 2층 발코니 아래에 자막을 설치할 수 있다. 나만 믿어라. 당신이 만든 말은 뉘어서 쓰고, 세익스피어가 쓴 말은 정자로 가고, 엎치락뒤치락 재미있지 않겠냐.” 그러더라구요. 구어체에다 방언도 들어가 있으니까 낯선 말이 많은데, 잘 받아들이더라구요, 볼거리만이 아닌 말의 힘이 있지 않나 생각해요. 좀 더 운문에 맞게 웬만한 것은 3·4조로 해치우려고 해요. 제가 만든 글자들이 지나갈 때 그 사람들이 재미있어 할지 궁금해요.

요즘 세상이 이미지화되고, 연극도 볼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하고 있습니다. 평론하는 제겐 많은 어려움이지요. 그래서 요즘엔 희곡 속에 침잠하는 것이구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에게는 기쁨입니다.

그것이 제가 국립극장에 올라가는 까닭입니다. 거기선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3~4시간짜리 연극을 하고 싶어도 여기(아룽구지)서는 못해요. 배우들 나이가 기껏해야 35살, 36살이니까. 국립극단에는 나이먹은 사람들이 한 30명 있거든요. 50~60대가 태반이에요. 제일 어린 사람이 32살이에요. 장민호 선생이 82살, 백성희 선생이 81살이고.

극단 목화의 수공업적 방법, 집단적 제작, 이런 것들이 연극 동네에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연극이 뮤지컬화되고, 이런 사회속에서 시간의 주름 같은 것을 스스로 안는 작업 방식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80년에 일본에서 제 작품 <초분>을 하겠다고 승낙을 받으러왔어요. “그래 좋은데, 너희들이 초분이 뭔지 아느냐. 민속 장례의식인데, 그거 내가 해줘야지.” 그래서 갔어요. 전부 종이옷을 입혔어요. 지금은 다른 걸 섞기도 하지만 그때는 순 종이옷이었죠. 무대위에 물이 들어오게 해서 누우면 잠기게 했거든요. 연극 중반쯤부터 물이 들어오는데 종이가 녹아서 결국 발가벗게 되죠. 등허리에는 종이가 남아서 생선가시에 살점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40명 출연하는데 11일 동안 공연했거든요. 누가 해주나요? 자기들이 만들어야지. 양면테이프로 붙여가면서. 잘 하는 놈은 30~40분이면 하지만, 못하는 놈은 한 두시간 걸려요. 옆에 사람한테 구박받아가면서 “와카리마시타, 와카리마시타” 하면서 만들어요. 4~5시쯤 극장에 나와서 그걸 만드는데, 하다보면 연극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 거기에 내 속임수가 있는 거에요. <로이오와 줄리엣>도 소품을 전부 배우들이 만들거든요. 디자인은 전문가가하지만. 항시 재봉틀이 준비돼 있고, 수선하는 것도 다 우리 애들이 하죠. 수도하는 분들이 경을 끊임없이 읽고, 삼보일배를 하잖아요. 하다보면 연극과 자기가 가까워지지않나. 생각은 손의 연장이죠.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은, 공연 시작 30~40분전에 확 집어던지거든. 그걸로 안할 수 없어요. 트럭에 부려놓기만 하는 거라. 스태프도 배우나 마찬가지로 늘 새로워져야 하는 거거든요.

극단 목화도 선생님 삶에서 빼놓을 수 없죠. 배우들이나 조명이나 의상을 맡은 분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할 수 있는 비결은 뭡니까? 특히 조명은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요. 그런데서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그 연원을 말씀해 주시죠.

신춘문예 당선되고 나서 <환절기>라는 작품을 했을 무렵인데, 동랑 선생(유치진)이 서울로 올라오라는 거에요. 그때만 해도 서울예대는 학교가 아니라 학원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시간표라는 게 있기는 했지만, 오후 4~5시쯤 나가서 연극 짓거리 하다가 저녁에 술 먹는 게 일이었거든요. 2년 과정이니까 워낙 짧은 데다가 시간표가 그러니까 무책임했죠. 그래서 졸업한 애들 열 몇명을 모아서 연극을 계속했죠. 그때 신문기자들이 ‘오사단’이라고 이름붙여줬죠. 그런데 7~8년 정도 하니까 같이 공부할 수밖에 없더라구요. 그러니까 연습량이 많아졌죠. 연습에 당할 사람 없거든요. 작품이 좀 달라보이니까 또 후배들이 들아오고. 배우 정진각은 74년부터 같이 했어요. 30년이 넘었죠. 부부라도 그건 어렵거든. 대체로 10년은 넘어 있어요. 인턴, 레지던트 제도는 없지만 극단에서 그런 걸 한 거 아닌가 해요. 지금도 30명 단원을 끌고가게 만드는 거죠. 예를 들어 1~2천만원의 지원금으로, 40~50명이 나눠요. 내 마음대로 4등급으로 나눠서, 맨 아래 애들은 그야말로 지하철 티켓 정도 주죠. 돈 안내고 배운다고 생각하는 거죠. 한 나라에 연극이 있어야 하는데, 돈 얼마줄테니 연극 같이 하자, 그렇게 안하는 극단이 하나는 있어야죠. 수업의 연장이죠. 전문의가 됐을 때쯤 팔려나가는 거죠.

잡지 않으세요?

못잡아요. 내가 돈을 못주니까. 35~40살 사이에 대체로 나가요. 그러니까 항상 제자리죠. 만들어 놓으면 가고, 만들어 놓은면 가고.

조명하는 분은 어떻게 같이 일하게 됐습니까?

박범신의 <불의 나라>가 신문에 연재되면서 막 뜰 때였는데, 일본 애들이 그걸 연극으로 하자고 해요. 도쿄 시부야에 있는 파르코 극장에서 했어요. 아사히신문사가 운영하는 극장이었어요. 그때 그 친구가 무대감독이었죠. 현지에서 밤을 새워서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사라진 모습이 여기 있으니까 형제가 된거죠. 그 사람이 일본 부토 조명의 일인자에요. 부토는 빛깔이 그 사람 내면을 얘기해주거든요. 나한테 딱 맞는 거죠. 이 친구가 돈 같은 것은 생각 안하고 와요. 비행기 값하고 약간의 사례비, 김치하고 김 몇 장 주죠. 의상하는 친구는 일본에서 3년, 이탈리아에서 6년 공부했는데, 스포츠웨어를 전공했어요. 그 빛깔에 우리 빛깔 섞어서 해보자고 해서 <백마강 달밤에>를 하게됐는데, 무당한테 연미복을 입히고, 엉뚱한 짓을 다 했어요. 옷이 가지는 힘을 알더라고. 그렇게 한번 하더니 발을 못 빼더라고요.

선생님이 작품을 쓰고 연출하고, 이런 분들이 무대를 맡고, 제자들이 연기를 하는, 우리 현대연극에서 드문 체제입니다.

바보같은 일이죠. 사제지간이까 된 거에요.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바보같은, 넋나간 집단 하나는 있어야죠. 다들 염려하지만, 지가 하겠다는데야 어떻게 해요. 여자애들은 시집안가고 그런대로 버티는데, 남자애들은 외아들이나 막내가 많아요. 지가 돈을 꼭 벌지 않아도 되는 그런 애들이죠.

장점이 아니라 약점이 있는 사람들을 잡고 계시네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런 문제들과 연극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홀로서기가 없어요. 집단의 움직임, 집단 이기심이 풍미해요. 군사정권 때는 어쩔 수 없었죠. 그런데 61년부터 40년 이상이 지났는데, 이제 모든 언어, 말하는 법이에서 홀로서기가 안돼요. 난감하죠. 어린 애들도 핸드폰을 안 가져오면 수업 포기하고 가지러 가요. 그게 있어야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죠. 전철을 1시간 동안 타고가는데 30~40분 동안 통화를 하는 거에요. 온갖 시시콜콜한 얘기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못 갖는 거에요. 하다못해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도 읽어야 하는데. 정보화가 될수록 외로워져요. 외로움을 감당할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해요. 일본만 해도 다방이나 까페나 들어가서 핸드폰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갖 쌍시옷 소리 다 나오고, 그러니 민망하죠. 혼자 있으려면 지식이 있어야 하고, 신념이 있어야 해요. 이걸 남한테 의존하니까, 식당 들어오면 티브이부터 켜요. 혼자 견디기에 대한 훈련이 각곳에서 일어나야 해요.

그냥 되는게 아니고 시간 안에 자기를 견고하게 세울 수 있는 사유나 사색이 필요하겠죠.

위대한 영혼들과 만나야지. 그러면 자기가 풍부해지고, 두발로 대지 위에 굳게 서있게 되죠.

선생님 추구하시는 작품과도 관련이 있습니까?

극장에서 같이 웃고 눈물 흘리리는 것은 나를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홀로 서 있는 게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같이 숨쉬고 있다, 급류속에 당당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죠. 자기가 웃을 때 다 같이 웃고, 울 때 같이 울고. 그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극장, 음악당, 미술관이 되는 거죠. 문화 속에 자기를 집어넣으면 혼자라는 염려를 안해도 됩니다.

후배들이나 연극하는 사람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 같습니다. 국립극장 얘기를 안할 수 없네요. 늘 현역이시고 스스로 아마추어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하고 싶으시고 왜 하고 싶은신지 말씀해 주세요.

국립극단은 볼거리 문화를 끌고 가는 수표교 같은 존재가 돼야죠. 그런데 전용극장이 없다보니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것과 똑같은 형태로 해요. 2달 연습해서 1주일 공연하고 없어져버리고. 어떤 지향이 없어요. 수표교로서 뭔가 서 있는 게 없어요. 신선희 극장장이 내년에는 달오름 극장이라도 전용으로 하자고 해요. 명동극장까지 하면 더 좋죠. 6개월 연습해서 한달이든 두달이든 공연 해야죠. 연습은 저희들끼리 약속이지만 관객들 앞에서 할 때 다 드러나요. 이 경험이 없는 거에요. 배우들이 다 고만고만 해요.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생리가 그렇게 돼 있으니까. 그래서 올해는 작품 딱 하나만 하자. 일본인든 미국이든 어디든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을 하자. 그런데 작년부터 밀려있는 것들이 있어서 하반기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오래전부터 문제로 지적돼 온 것인데요. 국립극단에 변화가 생기겠군요.

내년쯤에는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이 구분이 될 겁니다. 임기 3년차에는 대충 모양새가 꾸려진 상태에서 물러났으면 해요. 제가 양아치, 주먹이니까, 개고기 근성으로, 꽉 물면 안놓는 근성으로 해야죠. 다시 엣날로 가야 돼요, 좌충우돌하던 시절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기자가 쓴 글 중에 인상적으로 본 것이 “모든 사랑은 다 첫사랑이다.”는 겁니다. 그 글은 아마 첫사랑처럼 연극은 즐거움, 불안, 흥분, 순수, 아마추어 정신, 습작이란 말과 동의어가 아닐까 합니다. 연극이란 것, 혹자는 실험연극이라고도 하는데, 일상의 삶까지도 그런 첫사랑과 같은 아마추어의 열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국립극단에서 하시는 일이 서울시립극단 등 다른 국공립 극단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쎄, 그건 숙제죠. 올해가 병술년인데, 음력으로는 입춘이 두번 있는 해에요. 2000년에 12번 온다고 하네요. 지금 중국에서는 가게마다 난리가 났어요. 우리도 병술년 맥주나 한잔 하러 갑시다.

정리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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