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왕자, 호동> 공연을 위해 참고한 사진. 국립오페라단 제공
“공주를 잡아 넘겨라.” 딸의 배신에 치를 떠는 아버지는 비탄 속에 분노의 검을 내리친다. 뒤를 잇는 혼성 합창단의 장중한 합창. “호동왕자님, 좀 더 일찍이 오시지/ 좀 더 일찍이 오시지.” 그제야 도착한 호동왕자의 뒤늦은 탄식. “공주 어찌 된 일이오, 공주, 공주!”
사랑하는 고구려 왕자 호동을 위해 적의 침입을 알려주는 자명고를 찢어버리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낙랑공주의 이야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이 유명한 러브스토리는 강력한 서사의 힘으로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시선을 잡아끈다.
지난 3일 서울 예술의전당 동편 국립예술단체 공연연습장 엔(N)스튜디오. 오페라 <왕자, 호동>의 리허설 현장은 합창단원과 출연진 등 100여명에 가까운 인원이 뿜어내는 열기로 뜨거웠다.
오페라 <왕자, 호동> 포스터.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이 60년 전 창단 기념으로 초연했던 창작 오페라 <왕자, 호동>을 다시 꺼내 들었다. 오는 11~12일 서울 중국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를 <왕자, 호동>은 뮤지컬을 제작해온 한승원이 연출을 맡고,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여자경이 지휘봉을 잡는다. 국립오페라단이 1962년 창단 기념 공연으로 현제명, 김동진, 김대현 등 내로라하는 기성 작곡가들을 제치고 30살 신예 작곡가 장일남의 작품을 선택한 것은 당시로선 파격에 가까운 승부수였다. 한국적 소재에 ‘초연 창작 오페라’란 점을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일남은 이후 ‘비목’, ‘기다리는 마음’을 작곡하며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한 작곡가로 승승장구한다.
창단 60돌을 맞은 국립오페라단이 60년 전에 공연했던 작품을 다시 꺼낸 이유가 궁금증을 자아낸다. 연출가 한승원은 “미래 60년을 내다보는 관점에서 한국 오페라가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는 작품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 창작 오페라가 지닌 보편적 감성을 높이 평가했다. “해외로 진출하려면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권력을 위해 낙랑국의 왕은 딸을 죽이고, 고구려 왕은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왕좌를 차지하려고 대를 이어 죽고 죽이는 <왕좌의 게임>과 닮았다. 거기에 또 기막힌 사랑 얘기가 섞여 있어서 어느 나라에서나 통할 수 있다.”
주로 뮤지컬 분야에서 활동해온 한승원이 ‘케이(K)-오페라’를 얘기하고 있었다. “창작 뮤지컬이 빠르게 확장했던 시기랑 비슷한 현상이 보인다. 요즘 민간에서도 창작 오페라를 많이 공연하고 있고, 오페라 전문 대본 작가, 작곡가들도 많이 배출되고 있다.” 그는 “좀 더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다양한 관객층을 빨아들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뮤지컬도 전용 극장이 늘어나고 투자자가 생기고 전공 학생이 늘어나면서 관객이 늘었는데, 오페라도 곧 그런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보편적 감성을 지닌 창작 오페라에 한국적 색채가 스며든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면 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오페라 <왕자, 호동>의 연출가 한승원. 국립오페라단 제공
음악적 측면에서도 <왕자, 호동>은 한국적 색채와 선율을 지닌 작품으로 꼽힌다. 지휘자 여자경은 “곡에서 반음계 진행이 자주 나온다. 음이나 화음을 규칙적으로 떨리는 듯이 빠르게 되풀이하는 트레몰로 주법을 많이 쓰는데, 장일남 선생님 특유의 소리와 조우할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낙랑공주 역을 맡은 성악가 박현주는 “장일남 가곡의 특징인 비장함과 애절함이 오페라 작품 전반에 그대로 묻어난다”며 “60년 전의 작품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토록 한국적인 작품의 무대와 의상을 아일랜드 무대·의상디자이너 코너 머피에게 맡긴 점도 이채롭다. 한승원은 “우리의 전통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며 “고증을 하되 현대적인 느낌을 살리도록 주문했다”고 전했다. 이 역시 ‘케이-오페라’에 대한 전망과 맥이 닿아 있는 셈이다. 코너 머피가 만든 무대는 온통 황금빛으로 빛난다. 한승원은 “참혹한 권력투쟁의 공간이자 적나라한 욕망의 공간으로 표현하기 위해 무대를 황금성으로 치장했다”고 설명했다.
이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소품인 자명고는 끝내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자명고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극의 메시지와 내용보다는 자명고에만 집중하게 된다. 자명고를 미지의 물건으로 두는 게 훨씬 사실적인 해석이라고 봤다.” 한승원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기만의 자명고가 있다. 그 자명고를 찢을 건지, 내버려둘 건지는 각자의 몫이 아니겠는가”라며 “사실 어떤 자명고를 내세워도 관객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