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5년 동안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맡은 작곡가 진은숙. 통영국제음악재단 프리스카 케터러(Priska Ketterer) 제공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을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올해로 어느덧 20년을 맞았다. 그사이 아시아의 대표적 음악축제로 자리 잡았고,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올해부터 작곡가 진은숙(61)이 예술감독을 맡았다. 5년 동안 이 음악제를 책임질 그의 화두는 ‘다양성과 미래’다. 음악제가 개막한 지난 25일 통영음악당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윤이상 선생이 안 계셨다면 진은숙도 있을 수 없었죠. 그분은 한국 창작 음악의 대부입니다.” 진은숙은 “윤이상을 빼놓고 통영음악제를 설명할 수 없다”며 “올해에도 교향곡 2번과 현악4중주 5번, 소품, 가곡 등 그분 작품을 많이 연주한다”고 했다. 그 자신이 2005년 통영음악제 상주 음악가로 활동한 바 있다.
통영음악제의 연원도 1999년 통영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의 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듬해 ‘통영현대음악제’를 거쳐 2002년부터 ‘통영국제음악제’ 간판을 내걸었다. 2003년엔 탁월한 오보이스트이자 지휘자, 작곡자인 거장 하인츠 홀리거가 참석해 주목받았다. 그는 윤이상으로부터 오보에 협주곡을 헌정받아 초연한 사람이다. 이후 명성 있는 음악인들이 윤이상의 아우라가 깃든 통영을 찾았고, 이는 통영음악제가 국제 무대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진은숙에겐 통영음악제의 모델이 있다.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처럼 만들고 싶어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통영은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거든요.” 2014년 루체른 페스티벌 상주 작곡가로 활동했던 그의 말이기에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전세계 음악팬들이 즐겨 찾는 루체른 페스티벌의 경쟁력 가운데 하나는 루체른 호수의 수려한 경관이다. 통영음악당은 남해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음악제가 열리는 봄날의 통영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1300석 규모인 통영음악당 콘서트홀의 음향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장과 견줘 손색이 없다.
올해 통영음악제 예술감독을 맡은 작곡가 진은숙이 지난 25일 음악제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내년 음악제 구성은 라인업이 거의 완성됐어요. 2024년도 계획도 다 돼가고 있고, 2025년 음악제도 윤곽이 대략 나왔답니다. 좋은 연주자를 모시려면 3~4년 전부터 접촉해야 하거든요.” 꼭 초청하고 싶은 연주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다 계획이 서 있지만 아직은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이라며 웃었다. 그는 통영음악제가 세계 음악계에 소문이 자자하다고 했다. “세계의 음악축제는 두 종류로 갈려요. 꼭 다시 가고 싶은 축제가 있고,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축제가 있는데, 통영음악제는 전자로 분류돼요. 더구나 통영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입니까? 음악제에 참석했던 음악가들이 통영이 그렇게 좋다고 소문을 많이 내거든요. 저도 기회가 되면 자랑하고 다녀요.”
그는 다양성이란 화두에 꽂혀 있었다. “올해 음악제가 ‘다양성 속의 비전’이란 기치를 내걸었는데, 사실은 그게 앞으로 5년 동안 음악제를 관통하는 화두가 될 겁니다.”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혼합을 통해 미래의 새로운 비전을 찾아가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음악제에서도 다양성이란 화두가 곳곳에 스며 있다. 필름콘서트가 있고, 연극적 요소가 있는 무대도 선보인다. 개막 음악회 지휘봉을 잡은 달리아 스타셉스카는 실력을 인정받은 신진 여성 지휘자다. 소프라노 율리야 레즈네바는 러시아 국적의 사할린 소수민족이다. 노르웨이 출신 첼리스트 트룰스 뫼르크와 미국 작곡가 앤드루 노먼이 각각 상주 연주자와 작곡가로 초청받았다. “비주얼 요소가 있는 공연도 많이 할 겁니다. 독창적인 국악인들도 눈여겨보고 있고요.” 그는 “고전과 낭만, 현대음악을 고루 섞어 균형 있게 보여주려 한다”며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작곡가 작품도 계속 선보일 것”이라고 했다.
통영음악제 개막일인 지난 25일 저녁 통영음악당 콘서트홀에서 핀란드 출신 지휘자 달리아 스타셉스카가 노르웨이 출신 첼리스트 트룰스 뫼르크와 협연하고 있다. 통영음악재단 제공
다양성은 윤이상을 키워낸 음악적 자양분이기도 하다. 윤이상은 한국적 정서와 동양의 미학에 바탕을 두고 서양 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한국적 뿌리에 서양의 가지로 자란 거목’이 윤이상이다. 진은숙은 윤이상을 이어받되 서양 음악의 보편성으로 정면승부를 걸어 세계적인 작곡가로 우뚝 섰다. 진은숙은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음악의 언어는 차이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예술이다. 음악을 향유하지 않는 다양한 계층과 소통하는 게 통영음악제의 임무”라고 말했다.
통영국제음악재단(TIMF) 아카데미를 통해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작곡가 발굴도 그에겐 중요한 과제다. 지난해엔 4명을 선발할 계획이었는데 120명 넘게 몰려 14명을 뽑았다. 통영음악제는 이들의 작품을 청중에게 소개하는 창구가 될 것이다. 그는 “음악감독직 제안을 받고 1년 이상 망설이고 고민했다”며 “서울시향 때처럼 젊은 음악가를 발굴하고 지원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결심했다”고 했다. 서울시향 시절 그가 기획한 ‘아르스 노바’의 작곡 마스터클래스는 김택수, 신동훈 등 국제 무대를 뛰는 신진 작곡가들을 배출했다. 진은숙에겐 ‘과거의 윤이상과 미래의 윤이상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도 주어진 셈이다.
통영음악제가 지금의 규모와 위상을 갖추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분투가 있었다. 음악재단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음악제의 기틀을 다진 김승근 서울대 음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진은숙도 공개 석상에서 “김승근 교수가 음악제를 맨땅에 삽질하듯 키워놓았다”며 “잘 유지하고 더 발전시키는 게 제 역할”이라고 말했다. 윤이상의 이념 성향을 둘러싼 논란으로 정치 지형에 따라 음악제는 부침도 겪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는 예산 지원이 줄거나 끊기기도 했다. 보수단체의 공격에도 많이 시달렸다. 이용민 통영음악재단 대표는 “음악제나 예술 활동은 그 자체로만 봐줬으면 좋겠다”며 “정부가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통영음악제가 개막한 지난 25일 예술감독인 작곡가 진은숙(가운데)과 음악재단 이용민 대표(오른쪽), 김소현 예술본부장이 포즈를 취했다. 통영음악재단 제공
다음달 3일까지 이어지는 음악제의 모든 공연을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음악재단의 김소현 예술본부장은 “현대음악은 저작권 문제로 예산이 많이 들고 유료 티켓을 구입한 관객들의 입장을 고려해 라이브 중계를 주저했지만, 코로나로 환경이 바뀌었다”며 “직접 방문이 어려운 관객들을 위해 앞으로도 실시간 중계를 계속 할 것”이라고 했다. 라이브 중계는 공연 중에만 볼 수 있다.
통영/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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