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은 임신한 죄수, 그리고 12명의 여성 배심원. 러닝타임 180분의 연극 <웰킨>은 18세기 영국 시골의 얘기이지만, 지금 여기의 현실로 초점을 끌어당겨 봐도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무대는 여성 배우들로 가득 채워졌다. 영국인 원작자와 한국어로 옮긴 번역가, 연출가도 모두 여성이다. 연극 <웰킨>(The welkin)은 시종 여성들의, 여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를 통해 공정과 정의, 권력의지와 인간의 존엄이란 장대한 주제를 파고든다.
두산아트센터(6월7~25일)에서 만날 수 있는 이 흥미진진한 연극은 관객을 1759년 영국의 외딴 시골 마을로 데려간다. 그곳에 마을 유지의 딸을 잔혹하게 살해한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은 젊은 하녀 샐리가 있다. 사형수 샐리는 자신이 임신한 상태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당시 임신한 죄수는 국외로 추방당할지언정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배심원으로 뽑힌 12명의 평범한 여자들에게 샐리가 올가미를 피하려고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실제로 임신했는지를 판별하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배심원 가운데 한명인 마을 산파 엘리자베스가 필사적으로 샐리를 변호하면서 갑론을박이 펼쳐진다.
러닝타임 180분에 이르는 대작인데도 지루할 틈이 없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 설정,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와 밀도 있는 심리 묘사, 예측불허의 스토리 전개가 관객의 몰입감을 끌어올린다. 배심원들의 숨겨진 인생 내력이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연극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12명의 배심원, 그리고 그중에서 용의자의 무죄를 주장하는 단 1명의 구도는
헨리 폰다가 주연한 1957년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용의자가 살인 혐의를 받는 소년이란 점만 다를 뿐. 2020년 영국 초연 때도 ‘12명의 성난 여자들’이란 제목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거란 평가가 나왔다. 원작자 루시 커크우드는 <차이메리카>로 2014년 로런스 올리비에 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촉망받는 극작가다.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들을 통해 불공정한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왔다. 이 작품에 그가 소환한 약자는 집안일 하는 여성이다.
여성들이 무대를 가득 채우는 연극 <웰킨>은 시종 여성들의 이야기지만 이를 넘어 정의와 공정, 권력과 존엄이란 장대한 주제를 파고든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웰킨’은 하늘, 창공, 천국 등을 뜻하는 문어체 단어. 첫 장면에서 여성 12명은 각자 빨래와 청소, 절구질 등 각양각색의 집안일에 여념이 없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반복 작업을 수행하는 여성들은 하늘 한번 쳐다볼 틈을 내지 못한다.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배우 하지은은 “얼룩을 지우기 위해 고개 숙인 자들은 창공을 볼 수 없다”며 “지금 우리가 ‘공정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모두에게 공정한 것인지를 묻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물과 빵, 불과 양초가 금지된 채 법정 다락방에 갇힌 여자 12명은 하나둘, 금기를 깨뜨려간다. 마침내 “땅에선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인식에 이르고, 차츰 시선의 지평을 넓혀간다. 연극의 마지막, 여자들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의 혜성을 바라다본다. 연출가 진해정은 “하늘은 누구에게 열리고 닫혀 있는지, 땅은 어떤 사람에게 관대하고 가혹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한국 무대에 올려지게 된 과정이 이채롭다. 제작자나 연출가가 아니라 배우 하지은이 주도했다. 2020년 초 아마존 이(e)북을 통해 원문을 접한 하지은은 금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영어를 잘하는 편이 아닌데도 이야기에 매료돼 밤을 꼴딱 새우며 읽었어요. 지인분들 도움을 얻어 기획서 쓰고 번역 의뢰하고 지원금 받아 2020년 7월에 낭독공연을 할 수 있었고요.” 반응이 좋았다. 제대로 공연 무대에 올려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곡절 끝에 두산아트센터와 연이 닿았다. 하지은은 “영국 국립극장 홍보사진에서 여성들이 무대를 꽉 채운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희곡을 찾아보게 되었다”며 “여성의 자궁, 여성의 피, 여성의 장기들이 우글거리며 날아다니는 작품인데, 그로써 편견을 깨고 기존 언어에 도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형수 샐리 역의 배우 김별(오른쪽)과 샐리를 필사적으로 변호하는 마을 산파 엘리자베스 역의 배우 하지은. 하지은은 영국의 원작을 처음 읽고 한국 무대에 올리기까지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거칠고 반항적이며, 자유와 욕망을 노골적으로 갈구하는 젊은 여성 샐리는 배심원이나 관객이 자신에게 동정심을 발휘할 근거를 여지없이 걷어차 버린다. 샐리는 선하거나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며, 최소한 ‘옹호할 만한 악인’으로도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샐리를 바라보며 엘리자베스는 절규한다. “신 대신 원망할 수 있는 여자가 있을 땐 아무도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라고. “나보다 많이 가진 년은 다 죽여버리자”고 다짐하는 샐리의 복잡다기한 면모가 오히려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흥미를 배가한다. 이는 도덕적인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는 약자의 권력의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도 이어진다. 문학평론가 오혜진은 “소수자의 자학적이고 비윤리적이고 탈규범적인 욕망과 실천들을 안전한 도덕의 잣대 없이 그 자체로 직시할 수 있느냐고 이 연극은 관객들에게 조금 색다르게 묻고 있다”고 말했다.
18세기 영국, 시골의 일상은 지금, 여기의 현실로 초점을 끌어당겨 바라봐도 크게 낯설지 않다. 그리하여 당시의 시대착오적 현실이 지금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점에 새삼 놀라게 된다. 무대 위 여성 배심원들에게 법정 바깥에서 위협하고 야유하는 성난 군중의 함성이 수시로 들려온다. 진실에 다가서려는 배심원들의 조사 과정은 엄격하게 통제된다. 권력을 박탈당한 약자, 소수자가 분쟁에 임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일련의 환경과 조건을 상징하는 듯하다.
<웰킨>은 두산아트센터가 ‘공정’을 주제로 무대에 올리는 3편의 연극 가운데 두번째 작품이다. 제헌헌법 제정 과정을 다룬 이양구 작, 이연주 연출의 <당선자 없음>은 지난 5월 상연됐고, 7월엔 교육 시스템의 공정 문제를 다룬 <편입생>을 만날 수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