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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오 마이 갓! ‘경기필’ 더는 지휘할 수 없다니…

등록 2022-07-19 19:36수정 2022-07-20 02:34

음악감독 마시모 자네티 곧 이임
4년간 섬세한 음색 만들기 성공
23·25일 공연 끝으로 한국 떠나
“마법 같은 시간들” 진한 아쉬움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4년간 재직하다 이임하는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마시모 자네티가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경기아트센터 제공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4년간 재직하다 이임하는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마시모 자네티가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경기아트센터 제공

2019년 5월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이하 경기필) 음악감독 마시모 자네티(60)가 브람스의 교향곡 3번 리허설을 시작했다. 지휘자의 신호에 맞춰 연주를 시작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첫 마디는 소리가 제대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이어 힘차게 움직이던 지휘자의 손동작과 단원들의 연주가 완전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두번째 마디부터 갑자기 ‘생일 축하~합니다’의 선율이 흘러나왔던 것. 눈이 휘둥그레져 지휘를 멈춘 자네티는 곧이어 “오 마이 갓!”을 연발하며 폭소를 터트렸다. 단원들은 꽃바구니를 전달하며 마에스트로의 생일을 축하했다. 자네티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맺는 관계엔 오묘하고도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다. 흔히 생각하듯, ‘지휘자가 손을 휘젓는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주는 충직한 단원’이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짓궂은 단원은 일부러 틀린 음을 내 지휘자를 시험한다. 지휘에 빈틈이라도 보이면 대놓고 반기를 들며 어깃장을 놓기 일쑤다. 단원들의 끝없는 평가에 불안해하는 존재인 지휘자가 그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으며 오케스트라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4년간 경기필을 이끌다 이임하는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마시모 자네티는 이 어려운 지휘자의 소임을 비교적 성공리에 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지난 모든 순간이 마법과도 같았다. 이렇게 떠나게 돼 무척 슬프다”며 진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2018년 경기필의 첫 외국인 지휘자로 취임한 자네티는 오는 23일(경기아트센터)과 25일(롯데콘서트홀) 베르디 ‘레퀴엠’ 공연을 끝으로 한국을 떠난다. 2년 임기에 재계약 한번을 더 했으니 짧지 않은 세월이지만 그는 거듭 서운함을 표시하며 경기필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유럽 경험으로 보면, 지휘자가 어떤 오케스트라의 색깔을 만들고 성과를 내려면 보통 5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요. 4년이라지만 코로나19로 공백이 많았죠.”

2019년 5월 자네티 생일에 꽃다발을 선물하며 축하는 단원들에게 환호로 답하는 자네티(사진 왼쪽).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유튜브 화면 갈무리
2019년 5월 자네티 생일에 꽃다발을 선물하며 축하는 단원들에게 환호로 답하는 자네티(사진 왼쪽).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유튜브 화면 갈무리

그는 재임 기간 특유의 친화력으로 단원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경기필을 한층 성숙한 오케스트라로 끌어올렸다. 서울시향, 케이비에스(KBS) 교향악단, 국립심포니와 함께 ‘외국인 지휘자 4인방 시대’를 이끌며 ‘국내 4대 오케스트라’의 위상을 다졌다. 그는 “음색을 투명하게 하고 디테일을 다듬었다”는 점을 자신의 성과로 꼽았다. 웅장하지만 세부가 약했던 경기필 사운드가 그의 조련을 거쳐 날렵하고 감각적인 연주로 살아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박재홍과 임주희, 정지원, 선율, 윤아인 등 젊은 연주자들을 발탁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협연한 것도 의미 있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피아니스트 박재홍은 이 공연 몇 개월 뒤에 이탈리아 부소니 콩쿠르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우승했다.

그는 아쉬운 부분으로는 말러 교향곡 시리즈 연주 취소를 꼽았다. 교향곡 4번은 공연했지만, 차례로 연주하려던 3번과 6번, 9번은 무산됐다. 그는 리허설 현장을 공개하자는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은 점도 아쉬워했다. “유럽 오케스트라들은 대부분 리허설을 공개해요. 한국에서도 모든 리허설은 아니더라도 마지막에 하는 제너럴 리허설은 공개하는 게 좋아요.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질문과 답변을 통해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게 좋습니다.”

2018년부터 경기필하모닉 최초 외국인 음악감독으로 재직해온 지휘자 마시모 자네티가 오는 23일과 25일 베르디 ‘레퀴엠’ 공연을 끝으로 한국을 떠난다. 경기아트센터 제공
2018년부터 경기필하모닉 최초 외국인 음악감독으로 재직해온 지휘자 마시모 자네티가 오는 23일과 25일 베르디 ‘레퀴엠’ 공연을 끝으로 한국을 떠난다. 경기아트센터 제공

이번 베르디 레퀴엠은 원래 2020년에 공연할 예정이었는데 코로나19로 늦어졌을 뿐 고별 공연으로 의도한 건 아니라고 했다. “기존 진혼곡들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으로 그렸다면, 베르디의 레퀴엠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져요. 이 작품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왜?’예요. ‘왜 죽어야 하는지’, ‘왜 끝나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 물음이죠.”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이고, 기후변화와 경기침체, 계속되는 코로나19로 전세계가 위기에 직면해 있는 이 상황에 시의적절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저명한 지휘자 존 마우체리는 최근 출간한 <지휘의 발견>에서 지휘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작곡가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소리를 생산하는 많은 사람과의 협업에 힘입어 그 에너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지휘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컨덕터’(conductor)가 본시 ‘전도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착안해 내린 정의다. 이에 따르면 마시모 자네티는 적어도 단원들과 협업에 능란했고, 이를 대중에게 전하는 데도 열정적인 지휘자였다.

자네티의 후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경기아트센터 신임 사장이 부임하는 오는 10월 이후에야 결정된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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